나비박사 석주명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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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암흑기에 ‘조선(朝鮮)의 나비(Butterfly)’로 세계를 날며 우리 과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선각자.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지는 열정의 노력가.

이름하여 나비박사 석주명(石宙明).
1908년 평양 출신인 그가 나비 연구를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 은사의 권유로 박물과를 전공, 졸업 후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당시 23세. 그는 전국을 돌며 무려 75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 일일이 관찰하는 현장연구에 몰두한다.

이를 토대로 생물분류학의 새 장을 연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 이론’을 창안해 내기에 이른다. 그 결과 외국 학자들이 잘못 분류한 학명 844개를 말소하고 한국 나비를 248종으로 분류해낸다.

특히 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로부터 ‘조선나비 총목록’ 집필 등을 의뢰받는 등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인 나비 권위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1950년 10월 6일 오후 서울 충무로 근처 개울가에서 술 취한 청년들로부터 인민군으로 오인돼 총에 맞아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42세 나비 사랑의 마지막 항변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였다.
▲생전에 석주명 박사는 제주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소설가 이병철씨와 서울대 전경수 교수 등에 따르면 그가 제주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나비 채집에 한창이던 1936년(28세) 여름. 당시엔 제주도의 나비 연구가 목적이었다 한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인연은 1943년(35세) 4월. 경성제대부설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현 제주대 아열대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그 후 2년1개월간 제주에 있으면서 섬지역까지 도내 곳곳을 샅샅이 답사한다.

이국적인 독특한 자연 환경과 사회에 매료되면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된다. 그의 제주사랑은 1947년 ‘제주도방언집’을 시작으로 ‘제주도자료집’까지 여섯 권의 총서로 집대성돼, 오늘날 제주학(濟州學)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제주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리하고 연구했던 제주도학(濟州島學)의 창시자요, 제주민요 오돌또기를 즐겨 불렀던 나비박사는 사실 오랫동안 우리 역사 속에 묻혀 왔다.

이제 사후 반세기를 넘어 선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제주에서 열린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서귀포시는 제주사 정립에 공헌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토평동 5.16도로변 소공원에서 오는 11일 기념비 제막식과 함께 그를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도 갖는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을 10년간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성껏 가꾸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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