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진상 보고- 집단학살 어떻게 이뤄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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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공권력으로 인권유린 참극 도처에

군경 토벌대가 4.3사건을 진압하면서 자행한 집단 살상의 면모를 보면 국가 공권력이 잘못 행사되면 인권이 어떻게 유린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우선 1948년 11월부터 4개월간 중산간 마을 거주자는 모두 적이라는 전제 아래 벌인 ‘초토화작전’은 4.3사건 전개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을 빚었다.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려 해안 마을로 오도록 했으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전달되기도 전에 마을로 들어가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집단 희생을 당했다.

조천면 교래리의 사례를 보면 1948년 11월 13일 새벽 5시께 군인들이 다짜고짜 쳐들어와 불을 붙이며 총격을 가했다.
놀라 밖으로 뛰어나오던 주민들이 총격을 받아 쓰러지고 날이 밝아 총성이 멎었을 때 100여 호가 모여 살던 교래리는 잿더미로 변했다.

이날 확인된 희생자는 27명으로, 3세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으며 14세의 소녀는 대검에 찔려 있었다.
이 같은 사례는 애월면 하가리,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 표선면 토산리 등 전도에 걸쳐 이뤄졌다.

또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는 1948년 가을 제주도의 법조.행정.교육.언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돼 있었다.

제주지법 법원장, 제주지검 검사, 제주중 교장, 제주도 학무과장, 제주남교 교장, 제주신보사 사장이자 전 도지사, 제주신보사 전무, 제주신보사 편집국장, 제주도청 공무원, 재산관리처 직원, 신한공사 직원 및 간부, 의사, 경제인, 독립유공자 등이 망라됐다.

이들 중 일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대부분은 즉결 총살됐다.
이 같은 총살형을 집행한 것은 송요찬 9연대장과 정보참모 탁성록 대위, 특별수사대 최난수 경감,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 등으로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모두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것이다.

특히 탁성록은 마약 중독자였으며, 김재능은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빼앗았고 보급물자 배급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청 제2인자인 총무국장을 고문 치사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며, 최난수는 일제시대 독립군을 잡아 고문하던 친일 매국노였다.

둘째, 도피자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총살하는 ‘대살(代殺)’이 무자비하게 이뤄졌다.
이른바 가족 중 청년이 한 명만 없어도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 그 청년 대신 어린 아이와 노약자를 총살한 것이다.

이 같은 대살은 진압군 주둔지인 해안 마을에서 벌어졌는데 총살이 내내 그치지 않자 소개민들이 도피 입산함으로써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

애월면 하귀리의 경우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될 무렵 청년들이 모두 은신처를 만들어 숨어 있었는데 진압군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만삭의 임신부를 발가벗긴 후 팽나무에 매달아놓고 대검과 철창을 찔러 총살하는 등 참극을 자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외도리에서는 무장대에 납치돼 집안에 없음에도 진압군은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아내, 동생, 아들 부부, 자식과 조카, 손자, 생후 10일의 영아 등 4대 가족 10명을 한 자리에서 죽창으로 학살했다.

이 같은 사례 역시 전도에 걸쳐 이뤄진 보편적인 집단 살상의 면모다.
셋째는 자수자에 대한 살상이다.
말 그대로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해놓고 실제로 자수하면 집단 총살하는 비열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조천면 와흘리의 경우 진압군의 말을 듣고 청년 200여 명이 자수했으나 이중 150명이 집단 총살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졌다.
넷째는 함정 토벌로, 진압군이 무장대 복장을 하고 민가에 들어가 협조를 구하고 이에 응하는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을 말한다.

제주읍 도평리에서는 1949년 1월 진압군이 무장대로 변장해 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집결시켰으며 이를 눈치챈 일부 주민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음에도 70여 명을 몰살했다.

다섯째, 중산간 마을에서 집을 잃고 해안 마을에 왔다가 죽을 위기를 겪은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다시 산으로 올라가 굴과 숲속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압군에 쉽게 적발됐으며 무장대가 아니었음에도 진압군이 전과를 올리는 데 희생자가 됐다.

제주읍 용강리 지역 주민들은 진압군과 숨바꼭질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나 진압군의 급습으로 105명이 몰살당했으며 이웃인 봉개리와 회천마을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전개해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결과 360명을 사살하고 13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식량과 의류를 다수 압수했다고 전과 발표를 했다.

압수품으로 총기가 한 정도 없으면서 무슨 치열한 격전을 얘기하는 것인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 빌레못굴의 희생, 조천면 선흘리의 목시물굴, 다랑쉬굴, 동광의 큰넓궤 등 중산간 동굴에 숨어 지내다 발각돼 집단 학살된 사건은 수없이 발생했다.

여섯째, 보복 살상으로 무장대에 습격당해 사상자가 발생하면 도피자 가족에게 보복 살상을 가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조천면 북촌리 사례가 보복 살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대략 300명이 한꺼번에 희생됐다.

마지막으로 예비 검속자에 대한 살상이다. 한국전쟁이 나자 군은 과거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을 모아 만든 국민보도연맹 연맹원들과 반정부혐의자들을 잡아들였다.

군은 이들을 A, B, C, D 등 4개 등급으로 나눠 D급을 가장 중요한 자로 구분했다.
7월 말부터 8월 하순까지 제주.서귀포.모슬포.성산포경찰서별로 군당국의 총살 집행이 계획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제주와 서귀포경찰서에서 검속한 인원과 총살한 인원, 총살한 시기 및 장소를 공식적으로 확인해 줄 자료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 당시 수감 중이거나 관계 업무를 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 실체에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증언에 따르면 제주경찰서 관내에서는 수감자 중 500여 명이 산지항에서 배를 타고 가서 먼 바다에 수장됐다는 것이다.
또 수백명은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돼 암매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귀포경찰서 관내에서 검속된 인원과 총살자 수, 집행 시기와 장소 모두 아무런 기록이 없으나 15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이뤄진 예비검속과 총살의 경우 백조일손유족회와 만뱅디 유족회가 구성될 만큼 많은 사실이 알려졌다.

344명이 검속됐으며 이중 252명이 군에 송치돼 1950년 8월 20일 송악산 기슭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됐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멜젓을 담그듯이 사람들을 포개놓고 큰 바위들로 시신을 눌러놓았다고 한다.

성산포경찰서의 경우 76명이 검속됐으나 서장이 6명만 서귀포경찰서로 넘기고 나머지는 총살 집행을 거부하는 바람에 단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이밖에 무장대의 살상행위도 우익인사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이뤄졌는데 구좌면 세화리, 남원면 남원.위미리, 한림면 두모리, 표선면 성읍리에서 많게는 수십 명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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