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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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 전국시대 법가사상의 한 토막이야기가 있다.

오늘날 법치주의의 옛날 버전인 법가사상을 이룬 상앙(商?)은 원래 성군의 덕으로 백성을 돌보는 왕도사상가였다.

상앙이 진(秦)나라 효공(孝公)을 찾아가 왕도사상을 설득했으나, 효공이 거들떠보지 않자 패도(覇道)를 가지고 등용되게 된다.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자신의 사상을 하루아침에 바꾼 셈이다.

이처럼 등용된 상앙은 패도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치밀하기 짝이 없는 가지가지 법을 만들었고, 법을 어길 경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엄혹하게 처벌했다.

당시의 처벌은 신체형으로 사지의 일부를 자르거나 목숨을 빼앗았다.

어느 날 다음 왕위에 오를 태자가 법을 범하자 상앙은 “백성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위에 있는 사람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태자를 처벌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태자의 선생인 공자 건(虔)의 목을 베었고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얼굴에 죄명을 먹물로 새겼다.

태자의 선생까지 처벌하자,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태자가 즉위하자 상앙은 달아나는 처지가 됐다.

저녁에 여관을 찾아든 상앙은 여관주인은 여행증명서가 없다면서 거절한다.

자신이 만든 법 때문에 하룻밤 묵을 데가 없게 된 상앙은 그제야 엄혹한 법의 폐해를 탄식한다. 결국 상앙은 혜왕에게 잡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명박 정부들어 법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법치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용산의 철거민이 화재로 죽은 사건이 배경을 이루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처참하게 죽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던 이유를 곰곰이 성찰하지 않고, 단박에 법질서를 지키지 않아 비극이 일어났다고 하거나, 그 때문에 앞으로 엄격한 법의 집행을 통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야박하기 짝이 없다. 그 법과 그 질서는 아마도 개발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쫓겨난 철거민을 위한 것은 아닐 터이다.

미네르바 사건이 그렇고 1년전과 오늘의 촛불집회사건을 보더라도 그렇다.

생각해 보면, 법질서의 회복을 외치는 것은, 위정자가 부도덕하거나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이 전혀 먹히지 않는 국민,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국민을 볼 때 위정자는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의 폭력을 동원해 국민을 강제로 침묵시키고, 외견상 동의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상앙의 법치는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는 협박에 기초한 공포정치였다.

그렇지만 공포로 잠시 세상을 다스릴 수는 있겠지만, 장구한 평화를 얻기는 어렵다는 것을, 상앙의 최후가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거두절미하고 오직 법질서만을 외치는 법가들은, 뭇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 간단한 이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인가.

상앙이 위수(渭水) 가에서 죄수의 형량을 정할 때 얼마나 엄혹하게 법을 적용했던지 죄수들이 흘린 피로 인해 위수가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법가들은 길거리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난했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오늘날의 법치주의는 절대권력을 방지하고 인권을 세우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지 권력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한 과거 패도정치의 역사만 되풀이 될 뿐이다.

<강영진 정치부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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