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18)형무소 재소자 학살과 연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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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이 가한 가장 비열한 폭력

4.3사건 진압과정에서 자행된 가장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인권유린인 국가공권력의 불법적인 집단학살 못지 않게 법의 형식을 빌린 인권유린 또한 무시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우선 재판을 받아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됐던 4.3사건 연루 수형자들은 자신이 재판을 받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고 자신이 무슨 죄목으로 몇년형을 받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 4.3사건 수형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법적으로 즉결 처형되는 등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공권력의 남용에 의한 폭력과 살상의 희생자들이었다.

아울러 경찰과 계엄당국에 붙잡힌 사람들에게 가해진 국가공권력의 불법적인 고문과 폭력, 인권유린은 헤아릴 수 없으며 이후 4.3사건 연루자라는 딱지를 붙인 연좌제의 적용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가로막았다.

4.3사건 전개 당시 군.경이 자행한 고문으로는 폭행은 물론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 등 고문의 모든 종류가 동원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는 당시 사망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반세기 가까이 대물림됨으로써 제주사회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2000년 한 제주지역 시민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의 86%가 연좌제의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는데 공무원 임용,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 국.공기업 취직 또는 승진, 군.경찰에서 승진 등 불이익, 국내외 여행 및 출입국과정 불이익, 일상생활 감시, 각종 신원조회에서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좌제가 폐기됐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최근까지도 ROTC임용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군대까지 갔다온 노인은 해외여행 비자발급이 이뤄지지 않는 등 연좌제의 피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전체의 부도덕한 범죄이며 연좌제는 4.3사건과 관련해 국가공권력이 가한 가장 비열한 형태의 폭력이자 따돌림이었으며 그 피해의 중심에는 항상 제주사람이 있었다.

한국전 발발하자 수형인 집단 총살
연좌제 반세기 동안 유가족 짓눌러
43사건 관련 수형인 2500여 명 행불

형무소 재소자 희생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을 거쳐 1954년까지 4.3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수천명에 달했다.

4.3재판은 제주지법, 광주지법, 대구고법, 대법원 등에서 치러진 일반재판과 미군정 당시 군정재판, 군인.군속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 계엄령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 1949년 7월 예외적으로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민간인 군법회의가 있었다.

우선 일반재판 대상자 가운데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2일까지 제주지법에서 치러진 재판의 피고인은 480명이며 이들 중 1년 이상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전무하고 대부분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풀려나 형무소에 수감중 총살 당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계엄 당시 제외)의 일반재판인 수는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으나 4.3사건 발생 이후 8월 20일까지 977명이 검거돼 436명이 검찰에 이송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 1948년 하반기 4.3 관련 피고인은 131명이었으며 이 중 사형 1명, 무기징역 5명, 징역 8개월에서 15년이 82명 집행유예 8명, 무죄 19명이다.

1949년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는 총 599명의 피고인 중 361명이 실형선고 받았고 238명이 집행유예이며 이 중 사형 1명, 징역 10년 2명, 징역 8년 1명, 징역 7년 7명, 징역 6년 1명 등이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4.3사건 관련 민간재판 결과(1950년 6월까지)를 보면 징역 2년 이상 장기수형인은 20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 대부분은 목포와 광주형무소에 있다가 전쟁을 거치는 가운데 행방불명됨으로써 형무소 재소 첫 희생자가 됐다.

둘째 4.3사건 당시 군법회의는 군인 군속대상으로는 여러 차례 열렸으나 민간인 대상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됐다.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민간인은 1948년 871명과 1949년 1659명 등 총 2530명으로 확인됐다.

1948년 군법회의 결과 사형 39명, 무기징역 67명, 징역 20년 97명, 징역 15년 262명, 징역 5년 222명, 징역 3년 4명, 징역 1년 180명 등이다.

사형 집행은 1949년 2월 27일 오후 2시30분 제주읍 화북리 부근에서 이뤄졌으나 총살해 암매장하는 바람에 유가족 일부는 오현고 정문 오른쪽, 동제원 입구 왼쪽에서 시신을 수습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전주, 목포 등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직후 불순분자 처리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처리되고 일부는 옥문이 열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행방불명돼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1949년 군법회의의 대상자 1659명 중 사형은 345명, 무기징역 238명, 나머지는 징역 15년 308명, 징역 7년 706명, 징역 5년 13명, 징역 3년 25명, 징역 1년 22명 미확인 2명 등이다.

1948년 군법회의보다 형량이 강화됐음을 알 수 있다.

345명의 사형자 대상자 중 249명에 대한 총살은 1949년 10월 2일 제주비행장 해안에서 이뤄졌으나 유가족들은 희생장소와 날짜를 구체적으로 모른다.
유가족 중 시신을 수습한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군법회의 재판의 문제
군법회의를 통해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빠짐 없이 재판의 부재와 형식적 재판 절차를 증언하고 있다.

그 유형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군.경의 취조를 받고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형무소 이송 후 죄명과 형량을 통보받고 수감된 경우, 둘째 군.경의 취조 후 재판정으로 집단으로 출석시켜 호명하는 것으로 그치고 형무소 이송 후 죄명과 형량을 통보 받고 수감된 경우, 셋째 군.경 취조 후 재판정에서 출석시켜 호명 후 형량을 언도하고 형무소 수감된 경우이다.

이는 재판을 받지 않고 수감됐거나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형식적으로 치러진 재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군법회의 대상자들을 ‘수형인’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 감금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제주4.3특별법에 따라 희생자로 신고한 1443명의 군법회의 유죄판결자의 희생자 선정 심사에서 중대한 사안이며 4.3사건 당시 국가공권력의 법 적용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문서자료를 조사한 결과 군법회의 재판의 성립을 입증할 수 있는 기소장, 증인진술서, 예심조사보고서, 공판조서는 물론 영구보존 대상인 재판조서(판결문) 등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4.3 관련 군법회의 당시 판결문을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증거들이다.

제주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군법회의에 대해 한국정부와 국회에서 전혀 언급한 바 없고 당시 국내 신문에서도 관련 기사가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민간인 대상 군법회의에서 총 253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형과 무기징역형만도 각각 384명, 305명으로 단일 사건으로는 사법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재판임에도 이처럼 비밀리에 이뤄진 것은 의문일 수밖에 없다.

이는 군법회의를 주관한 제주도 계엄지구사령부와 제2연대가 재판을 실행하지 않았거나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형식적 재판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결국 제주에서 이뤄진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형무소 재소자 희생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일반재판과 군법회의를 거쳐 수감된 사람들은 목포와 광주, 서대문, 마포, 대전, 대구, 인천, 전주, 김천, 부천, 진주, 부산, 안동형무소에 분산됐다.

이 수형자들은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에 의해 집단으로 총살(서울.인천은 제외)됐다.

당시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3만7335명이었고 총살이 집행된 평택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는 2만229명이었다.

제주에서 이송된 4.3사건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군법회의 대상자 2350여 명 등 2500여 명이었으나 대부분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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