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문화’, 빛과 그늘
‘부조문화’, 빛과 그늘
  • 오택진
  • 승인 200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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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은 예로부터 인정이 많았다. 이웃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의 일인 양 두 소매를 걷어붙여 힘을 보탰다. 기쁨.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만큼 좋은 미덕이 있을까. 이 같은 상부상조의 정신은 경조사를 통해 더욱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케 했다.

화산활동에 의해 생긴 절해고도 제주. 거센 바람과 척박한 토양을 일구며 고단한 삶을 꾸려야 했던 옛 조상들은 경조사 등 ‘큰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부조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상부상조의 정신은 많이 퇴색됐다지만, 경조사부조(慶弔事扶助)만큼은 아직도 우리의 생활 저변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먹는 일’ 또는 ‘돌아보는 일’을 중시했다. 그것은 다른 지방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이 ‘부조문화’는 오늘날 더불어 사는 사회의 미덕으로 인식되고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이는 무엇보다 경조사비가 서민가계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데 기인한다. 가뜩이나 감귤값 폭락으로 불황의 골이 깊어진 요즘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 번 오른 인플레 경조사비는 여간해서 내릴 줄 모른다. 그렇다고 ‘돌아보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순 없다. 이를 소홀히 하면, 상호관계가 소원해지고 심지어는 왕래를 끊는 경우마저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해선 빚을 내서라도 경조사는 챙겨야 하는 게 현실이다.
특히 초상시 여성들의 겹부조 관행은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돌아보는 일’로 인해 웬만한 가정에서 지출하는 부조금은 한 달 평균 20만~30만원. 가정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치면 전국에서 상당히 높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한편으로 경조사를 치르는 측에서도 부담이긴 마찬가지다. 음식은 어떻게 차려야 하며, 답례품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일쑤다.

부조관행은 선거 등 제주의 정치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지망생들은 지역구의 경조사를 챙겨야 한다. 그래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 이처럼 선거에서 경조사 챙기기는 당락을 결정하는 주요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후보자의 능력이나 정책.비전보다도 우선시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직 단체장.지방의원들도 돌아보는 일에 시간.경제적인 부담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올 들어 도내 단체장들이 공개한 업무추진비 집행내역을 보면 경조사 관련비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역시 전국에서 상당히 높은 비중일 것이다.

이제 부조문화는 그 전통과 미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서민가계의 부담을 줄이고, 정치문화의 후진성을 탈피하는 방향으로 새 풍속을 모색해야 한다. ‘돌아보는 일’을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를테면 음식을 덜 차리고, 답례품을 없애는 대신 어려운 경제사정에 맞게 부조금 액수를 줄이는 것이다. 겹부조 관행을 없애 단일부조화하는 것은 더욱 절실하다.

얼마 전 서귀포시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는 부조금을 낸 사람과 그 액수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을 없애자는 제안이 있었다. 형편이 나으면 더 많이 할 수 있고, 어려우면 덜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풍속은 ‘상풍하속(上風下俗)’이라 했다. 부조문화 개선에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하고, 더 나아가 이를 수용하고 동참하는 의식전환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