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 도덕적 양심과 기술적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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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찾아보면 양심이란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정선을 명령하고 사악을 물리치는 통일적인 의식’이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하는 양심의 원론적인 의미는 그렇지만 시속에 따라 나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 싶다.

하나는 그렇게 원론적으로 ‘도덕적인 양심’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양심’이다.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들만이 아니라 누항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장삼이사들도 흔히 크고 작은 비리의 유혹에 직면하곤 한다. 몇 푼의 돈일 수도 있고, 한 자리의 향응일 수도 있고, 손톱만한 이권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절대로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기준이 바로 도덕적인 양심이라고 하겠다.

반면 솔깃하는 마음은 굴뚝 같지만, 분명히 뒤탈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몸을 사리는 기준이 이를테면 기술적인 양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일이 들통나지 않을 리 없다. 혹은 눈앞의 작은 이익이 장기적으로는 해가 될 수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적인 양심의 기준에 따라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곤 한다.

물론 사전에 올라 있을 리는 만무하고, 참여정부 들어서도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정치자금 스캔들을 지켜보다가 만들어본 말이다.
여당 대표에게서 청와대로, 야당으로, 경선자금에서 대선자금으로 어지럽게 번져가고 있는 스캔들을 지켜보면서 너나없이 혀를 끌끌 차고는 있지만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정치인들에게 도덕적인 양심을 요구할 만큼 순진한 시민들은 없을 것으로 본다.

또한 동서고금의 정치판이 본래부터 그렇게 도덕군자들에 의해 움직여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저마다 큰 꿈을 품고 있을 정치인들이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있는 기술적인 양심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생각해보자.

돈뭉치를 싸들고 온 상대가 과연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혹은 기업인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현금이라면 우선 챙기고 본다.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으면 불법 정치자금이 된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아랫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데 그쳐버린다(혹은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요즘처럼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추적이 집요한 시대에, 언젠가는 표면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짚어보지도 않는다. 가령 2억원을 받았다고 칠 때 우선 1억원 수수가 드러나면 나머지 1억원 또한 곧 밝혀진다는 우려도 하지 않는가.

언제고 이런 사실들이 공개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꺾이는 것은 물론, 소속한 당이나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은 눈앞의 유혹 앞에서 너무 사치한 것인가.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선거에 이기면 그만’이라는 구시대적인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것 또한 도덕적 양심을 떠나 기술적 양심의 범주에 들어간다.

여론에 몰린 끝에 23일 발표한 민주당의 대선자금 내역도 궁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명색이 집권당에서 대선이라는 대사를 치르면서 모으고 쓴 돈의 내역이 한 가정의 주부가 적는 가계부보다 못한 수준이니 자연히 감춰진 부분이 더 많을 것이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신고한 내역에서 하나도 더하거나 뺄 사항이 없다며 버티고 있는 한나라당도 다를 게 없다. 그 내용 그대로 믿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안 믿어도 그뿐, 생색만 내면 된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본래부터 찾아볼 수 없는 도덕적인 양심과 함께 기술적인 양심이 결핍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제 정치인들에게 도덕적인 양심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기술적인 양심이라도 갖추라는 충고를 던지고 싶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상식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합리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부도덕한 정치가의 성공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상식에 맞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가지지 못한 정치가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일은 걸린다. 내게 오히려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평범한 장삼이사들도 피해가는 함정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대서야 정치지도자라는 이름이 아깝다. 마음대로 말을 만드는 것이 한 번 더 허용된다면 ‘양심의 데크니션’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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