遺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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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짓기도 힘들지만 해석도 어렵다. 띄어쓰기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 갈 수도 있고, 가방에 들어 갈 수도 있는 게 글이다. 해석도 예외가 아니다. 같은 글귀도 해석에 따라 ‘예’도 되고 ‘아니오’도 된다.

70세 노인의 유서(遺書)만 해도 그렇다. 한문을 인용해서 안됐지만, 그 유서는 ‘七十生男非吾子 女壻外人不可侵(칠십생남비오자 여서외인부가침)’이다. ‘七十에 生男한들 非吾子랴. 女壻는 外人이니 不可侵하라(일흔에 아들을 낳은들 내 아들이 아니랴. 사위는 바깥 사람이니 간섭치 마라).’ 곧 일흔둥이도 내 아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七十에 生男하니 非吾子다. 女壻外人은 不可侵하라(일흔에 아들을 낳았으니 내 아들이 아니다. 사위 이외의 사람은 간섭치 마라).’ 즉 일흔둥이므로 내 아들이 아니란 뜻도 된다.

누가 이 글을 해석한다 해도 유서를 쓴 자의 뜻과 다르다면 바른 해석일 수가 없다. 오로지 유서 작성자의 뜻에 따라 전자도, 후자도 정답이 될 수 있는 게 이 글의 묘미다.

요즘 유분(遺粉)이란 말이 자주 쓰인다. 고(故)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 때문이다. 유서에는 이 말이 한글로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遺粉’이란 한문자로 서슴없이 쓰고 있다.

하지만 막상 한글 사전에는 ‘遺粉’이란 단어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신조어는 있게 마련이니까.
정 회장의 유서도 결코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장해 달라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표현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선지 유족들은 화장은 않되 정 회장의 머리카락, 손.발톱, 소장품 등을 금강산에 안치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모양이다. 정 회장은 죽어서도 혼이나마 금강산에 남고자 했던 것 같다. 그의 대북사업에 대한 애착을 짐작케 한다.

정 회장 자살과 관련한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성명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성명은 “정몽헌 회장 사망은 자살이라 할 수 없다. 한나라당이 불법.비법으로 꾸며 낸 특검의 칼에 의한 타살”이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특검은 무엇인가. 대북송금을 수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다. 그렇다면 대북송금에 가장 덕을 본 것은 또 누군가. 바로 북한이다. 만약 북측 성명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그를 죽게 한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대북송금과 대북 경협에 가장 재미를 본 북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정 회장의 죽음 뒤에는 대북사업이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조문단도 보내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도 중단해버렸다. 이는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라”는 고인의 유서와도 정면 배치되는 처사다. 북한은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는 고인의 영혼까지 모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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