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 한 마리가 창건한 디즈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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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식 제주대 교수.경영학.논설위원>



최근 몽니(꼬마해녀), 몽생이(제주갈옷의 세계적 브랜드), 보들결(제주한우 공동브랜드), 소중이(섬집아이), 삼다수(생수), 제주마씸(제주중소기업 공동브랜드), 청정제주(도가 인증한 공동상표 브랜드), 해올렛(제주시지역특산물 명품공동브랜드), 햇살바람(도내 6개 농협 공동브랜드)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꿈이 현실이 되는 시대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오르지 못할 고지는 없다.” 이 말은 ‘꿈의 제왕’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가 한 말이다.

월트는 전설적인 애니메이터인 동시에 자수성가한 기업가이며, 현대 미국문화의 아이콘이자 미국문화 그 자체를 재창조한 인물이다. 그의 성공은 ‘미국적 상상력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귀여운 ‘생쥐’ 한 마리로부터 월트의 도전은 막이 오른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세계 속에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제국’을 창건하는데 성공한다.

그가 바로 유년시절 농장에서 함께 뛰놀던 동물들을 그림으로 그려가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던 월트 디즈니이다. 미키마우스를 비롯해서 그가 창조해 낸 수십여 종의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있다. 월트 디즈니사가 그 캐릭터들로 벌어들이는 한 해 수입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100만 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규모이다.

미키마우스의 창조자이자 디즈니랜드와 월트 디즈니월드의 설립자인 월트 디즈니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스페인계 교회목수 집안의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월트의 어린 시절은 우울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했으며 아들에게 관심도 없이 매일 폭행을 일삼았다. 그런 아버지가 사업에 번번이 실패하자 온 가족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게 되었다. 미조리주 마르셀린 근처 농장에서 자라난 월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소년시절의 대부분(1910년부터 1917년까지)을 캔사스시에서 보낸다. 월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져 7살이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이웃들에게 팔기도 했다. 그는 1917년 다시 시카고로 돌아오게 된다. 낮에는 학교에서 교지 미술편집 담당으로 활동하고, 밤에는 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며 만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1910년대 말 전쟁이 끝난 후 월트는 광고만화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1928년 미키마우스가 그에 의해 창조되고 그 해 11월 18일 개봉된 세계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월트 디즈니사는 그가 1928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을 설립하면서 비롯된다. 그는 1932년에 ‘꽃과 나무들’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첫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된다(평생 아카데미상 29회, 에미상 4회 수상). 그 후 백설공주(1937), 피노키오(1940), 신데렐라(1950), 메리포핀스(1964), 인어공주(1989), 귀여운 여인(1990),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디즈니사는 영화, TV, 홈비디오 제작 및 유통뿐만 아니라 미국, 파리, 도쿄 등의 테마파크와 하키팀(마이티 덕), 출판(히페리온), 음악(할리우드레코드), 캐릭터상품, 호텔(딕시랜드스호텔 등), 외식산업 등에 진출하고 있다.

상상력으로 세운 디즈니 제국은 월트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쇠락하기는커녕 끊임없는 혁신으로 더욱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월트의 이러한 신화 창조의 원동력에 대하여 꿈, 믿음, 용기, 실천의 네 가지 키워드를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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