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상선의 출범과 하멜의 재발견
하멜상선의 출범과 하멜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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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6일 하순항 근처 용머리 해안에서는 헨드릭 하멜 일행이 350년 전에 제주 해안에 표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남제주군의 주관하에 하멜이 타고 표류한 ‘스페르웨르’호와 비슷한 모형의 ‘하멜’호의 진주식이 있었다.

하멜호를 보고 있느라면 17세기의 해양 패권을 장악하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역활동을 했던 네델란드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하멜호에는 하멜시대의 전시물뿐만 아니라 작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네델란드 사람 거스 히딩크 감독의 전시관도 함께 있다.

헨드릭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써서 처음으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구인들에게 알렸다면, 거스 히딩크 감독은 축구를 통해 한국인들의 강인한 정신과 투지를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네델란드인이 공교롭게도 350년 후에 제주에서 다시 재조명된다는 것은 역사적인 시간성을 뛰어넘는 어떤 인연이 제주 사람들과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두사람을 적절하게 묶는 콘텐츠를 개발한 남제주군 관계자분들에게도 그 훌륭한 아이디어에 깊은 찬사를 보낸다.
한편 8월 18일에는 ‘하멜의 재발견:제주-네델란드 협력’이라는 주제로 제주대 평화연구소와 네델란드 사회과학원(ISS)이 공동 주최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1653년 하멜이 대만에서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 해안에 표류하고, 그 이후 13년 동안 한국에서의 핍박과 고난의 생활을 거쳐 가까스로 나가사키로 탈출, 고국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멜의 끈질긴 삶의 의욕과 진취 정신이 투철한 데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진취정신을 우리는 하멜에게서 배워야 한다.

17세기의 네델란드는 영토는 작았지만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화란상인을 중심으로, 해상력을 장악했던 패권국가였다. 그리고 오늘날은 1700만 정도의 인구와 작은 영토를 가진 국가이지만, 2만5000달러의 국민소득과 헤이그, 암스테르담 등 세계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가장 세계화가 잘된 국가 중의 하나이다.

대학을 졸업한 네델란드 사람이면 누구나 영어는 모국어처럼 잘하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 보통 3~4개 국어는 한다고 한다. 이런 어학능력이 네델란드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곳곳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네델란드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구교와 신교 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됐던 국가이다. 그 이후 네델란드는 다양한 종교와 인종갈등을 넘어 서로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른바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al democracy)를 발전시켜 온 나라이다.

관용(tolerence)이란 자기와 견해가 다른 것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 다양한 인종과 종교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인들로 하여금 모범적인 민주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게 했다.

요사이 우리 사회에 노사갈등이 무척 심각하다. 혹자들은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킨 ‘네델란드 모델’을 우리의 노사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네델란드 모델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면에 깔린 ‘관용’에 바탕을 둔 노사문화를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분단의 영향으로 흑백적 사고가 강한 우리 문화에서 그러한 관용의 문화가 발 디딜 틈새가 있을까? 네델란드에게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다양성에 기반을 두고 과정을 중시하는 관용의 태도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하멜과 히딩크를 생각하면서 국제자유도시를 지향하는 우리 제주인들에게도 네델란드인들의 진취적인 마인드와 관용의 정신이 각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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