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항일운동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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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공식 인정후 남은 과제는
유공자 추가 선정·正史편집 등 뒤따라야
1932년 1월 12일 오전 세화리 장날
해녀 1000여명 어업조합 횡포에 봉기
8월 주역 4명 독립유공자 첫 선정


일제강점기 성산.구좌 지역을 중심으로 8개월여 간에 걸쳐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전개돼 제주도 항일운동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제주해녀항일운동’.

일제 치하 전국 항일운동사에서 여성이자 어민이 주도한 최대 항쟁이라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는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4명이 지난달 독립유공자로 선정됨에 따라 그동안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주해녀항일운동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제주해녀항일운동
1932년 1월 12일 오전 세화리 장날.
구좌면 하도.세화.종달.연평리와 성산면 오조.시흥리 등지의 해녀 1000여 명은 해녀들을 수탈하던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의 횡포에 맞서 봉기, 격렬한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일제가 전복과 미역 등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헐값으로 강탈하고 각종 세금을 부과하며 수탈을 강화하자 해녀들이 생존권 수호를 위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선 것.

이들은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면서 만세를 외치며 세화장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집회를 열어 각 마을의 해녀 대표들이 차례로 연설을 한 후 지정판매 절대 반대와 입어를 못한 자에 대한 조합비 면제 등의 요구조건을 초도 순시차 구좌면을 방문한 도사에게 제시했다.

해녀항일운동 이후 50세 이상의 해녀와 미성년자에게는 해녀조합비가 면제되고 각종 관제조합의 횡포도 매우 축소되는 등 해녀들의 요구 사항 대부분이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해녀들은 비밀결사단체인 혁우동맹으로부터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과 근대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을 받았다. 해녀운동의 주동자인 부춘화.김옥련씨 등은 하도강습소(하도보통학교 야간부) 제1회 졸업생이다.

이 해녀들은 청년 교사들에게서 ‘농민독본’과 ‘노동독본’ 등의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과 한문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조명
정부는 지금까지 항일투쟁을 주도한 해녀들에 대해 해녀항일운동 내용이 불명확하다는 이유 등으로 독립운동 유공자에서 제외시켰다.
또 사회주의 이념을 통한 민족 해방을 표방한 비밀결사로 해녀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혁우동맹원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활동과 광복 후 좌익활동 등을 이유로 독립운동 유공자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시켰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달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김옥련씨(96)와 고(故) 부춘화씨 등 해녀 2명을 처음으로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배후에서 항일운동을 지도했던 고 문도배, 고 한원택 선생 등 2명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또 최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김옥련, 부춘화씨를 비롯해 부덕량, 김려찬, 부승림, 한문옥, 한이봉, 좌창인씨 등 제주해녀항일운동 주동자가 공식적인 서류에서 확인됐다.

이에 따라 국가 차원의 역사적 재평가와 함께 남은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부승림씨 등은 해녀운동을 지원했던 혁우동맹원이 아닌 마을 청년인 것으로 알려져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지역 청년과 일반 농민들도 가담한 초계층적인 대규모 항일운동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학자 박찬식 박사는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20년대 청년.사회운동의 결집이었다”며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명확히 해 역사와 국민에게 중요성을 각인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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