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디지털 시장 선도하는 제주출신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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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이노텍 사장 허영호 사장 인터뷰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섬 소년이 세계 1등만이 살아남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최첨단 디지털 시장을 선도하는 초우량 글로벌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돼 제주인의 기개를 높이고 있다.

세계 첨단 전자부품 분야의 최강자로 도약중인 LG이노텍의 허영호 대표이사(57.한국광산업진흥회장).

제주일보는 창간 64주년을 맞아 허 대표이사를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여의도 LG그룹 본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의 꿈과 성공적인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그의 기업 활동과 열정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신화를 써내려간 바로 그 역사와 닮아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자제품이 일본의 소니 등과 같은 세계적인 전자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날이 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며 우리 국민의 능력과 일에 대한 열정이 그것을 가능케 했음을 흐믓해했다.

허 대표이사는 제주시 중산간 마을인 회천출신으로 신촌초등학교와 조천중학교, 오현고(19회), 서울대 전자공학과(71학번)를 나왔다.


"TV를 집집마다 보급하고 싶었다"

그는 "대학시절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인기리에 방영중이던 '여로'라는 드라마를 보려고 마을에 한 대 있는 14인치 흑백TV앞에 모여 있었다"며 "그 때 집집마다 TV를 보급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겠다 싶어 TV를 만들던 금성사에 들어가게 됐다(1977년)"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서울 본사 근무를 희망할 때 나는 생산현장인 구미를 자원해서 내려갔는데 지금 보면 올바른 선택이었다"며 "지금 사장에 오른 것도 그 선택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실무를 아는 것, 현장을 아는 것은 책상에서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며 "발로 뛰고, 땀을 흘리고 밤새워 일하고 배우는 것을 통해 상황판단능력과 소통능력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고 그러다 보니 기회도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평생을 TV를 만드는 것과 관련된 일을 했고 우리나라의 TV가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성장하기 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첫 부서가 TV생산기술과였고 TV설계실장을 거쳐 TV공장장까지 지냈고 임원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DVD사업담당, TV OBU장을 역임하는 등 기업 CEO가 되기전까지 TV를 만드는 현장을 지켜왔다.

그 사이 우리나라의 집집마다 TV가 전부 보급됐고 그가 처음 하고자 했던 일은 모두 이루어졌다.


"세계 최고의 부품산업을 일으켜보고 싶다"

허 대표이사가 경영하는 회사인 LG이노텍은 첨단 전자부품 분야의 기술개발과 시장개척을 주도하며 성장잠재력이 큰 모바일, 디스플레이, 네트워크, 차량부품, LED, PCB(인쇄회로키판)등 6개 시장영역에서 글로벌 전문부품기업으로 성장중이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초정밀 포토에칭기술과 디지털 튜너, 소형모터 부문과 함께 파워모듈과 무선통신부문에서도 시장을 선점해가고 있으며 소자소재분야인 LED, PCB에 대한 경쟁력을 높여 차량부품 시장에 진출하는 등 미래성장동력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허 대표이사는 "한국은 제품 위주의 마케팅은 상당한 수준에 올랐는데 부품 쪽은 참 허약한 형편"이라며 ""기본이 약하고 성공체험도 별로 없어 B2B(기업간 전자상거래)분야에서의 '마케팅 로직'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한다.

그는 또 "IT, 소프트웨어 다 좋지만 우리나라는 굴뚝산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부품사업의 경쟁력을 키워서 이 굴뚝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제 조금이라고 기여하고 싶은데 이거 너무 거창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해 아직도 일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그는 "80년대 초반 일본주재원으로 나가 5년 반을 그곳에서 일했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우리의 전자회사가 소니같은 일본의 전자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올 줄을 생각도 못했다"며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은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일이 있으면 간다는 것이 내 신조"

그는 마흔이 되던 해에 LG전자 구미공장장이 됐다.

당시 부품국산화가 최대 이슈였는데 자체개발한 부품 하나에 품질사고가 생겨 공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었다.

그는 "근로자들 중에는 저 보다 10년 이상 선배들도 많았는데 그것을 극복하면서 인간관계를 많이 배웠고 그 이후 부터는 어려움에 처한 조직만 계속 맡아온 것 같다"고 되새겼다.

실제로 그는 2000년 IMF직전 매출 3000억규모이던 LG마이크론이 여유자금 630억을 대우채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입어 어려움을 겪자 그 회사 사장으로 발령났고 1년만에 손실금을 모두 회복시켜 흑자를 내는 실적으로 회사를 정상으로 돌려놓고 코스닥에 상장시켰다.

그는 또 "마이크론이 살만해지니까 이번에는 이노텍 부품사업이 어렵다며 그리로 보내는데 '내가 필요하니 보내겠지'하고 불만 없이 받아들였지만 회사 상황은 심각했었다"며 "그 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심한 불면증이 왔다"고 최고경영자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는 그때의 불면증 치료 노하우도 터득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육체적인 스트레스의 불균형이 바로 불면증을 만드는 것으로 분석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인근 학교운동을 달리고 또달리는 것을 3개월간 지속한 결과 불면증을 치료하고 체중감량 효과에 일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회사 공장이 광주에 있었는데 구미에서만 생활하다 광주로 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고 고민하다가 광주 첫인사로 광주의 상징인 망월동 5.18묘역과 무등산을 둘러 보고 광주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광주 공장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받아들여줬다"고 말했다.

그는 "만성적자에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직원들과 수많은 토론을 하며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며 같이 노력한 결과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매출을 기록하기 시작했다"며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게 중요함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크론을 떠날 때 너무 아쉬워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작년 마이크론 사장을 겸임하고 지난 7월1일 두 회사가 합쳐졌다"며 "아마도 간절히 원하면 이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LG이노텍은 그가 사장을 맡기 직전 2001년 매출액 3000억원규모에서 8년이 지난 올해에는 3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기대될 만큼 10배의 성장을 이루고 있고 직원만 5000명에 이르고 있으며 최근에는 파주에 2000억을 투자해 LED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처럼 LG그룹내 골치 아프고 만성적인 어려움을 겪는 곳의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해온 그의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은 그를 근성있는 현장 경영자이자 LG그룹의 해결사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서울=강영진 기자>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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