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첨병으로 떠오른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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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의 막걸리 예찬은 천상병의 시 ‘막걸리’ 못지않게 시원하다.

‘큼직한 사발에다 넘싯넘싯하게 그득 부은 놈을 처억 들이대고는 벌컥벌컥 한입에 주욱 다 마신다. 그러고는 진흙 묻은 손바닥으로 쓰윽 입을 씻고 나서 풋마늘대를 보리고추장에 꾹 찍어 입가심을 한다. 등에 착 달라붙은 배가 불끈 솟고 기운도 솟는다.’

백릉의 수필 ‘불가음주 단연불가(不可飮酒 斷然不可)’ 중 배부르라고 먹는 막걸리의 일부분이다.

애주가들은 막걸리란 말에서부터 온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막걸리는 잘 발효된 술의 맑은 윗물(청주)을 떠내지 않고 술 밑을 체에 밭아 그대로 걸러낸 술이다.

그러니 이름 속에 술의 제조 과정과 맛까지도 배어 있다.

옛 문헌에서는 막걸리의 음을 따라 ‘莫乞里’라고 쓰기도 하고, 탁배기를 음차해 ‘탁백이(濁白伊)’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름도 많아 시큼텁텁하고 들쩍지근한 술맛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빛깔이 탁하다고 하여 탁주 또는 탁배기, 탁료라 하는데, 고관들이 마시는 맑은 술 청주가 아니라 서민들의 술임을 암시한다.

술빛이 쌀처럼 희대서 백주(白酒)라고 하는가 하면, 집집마다 담그니 가주요, 농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술이니 농주다.

일하는 사람들이 마신대서 사주(事酒), 맛이 좋지 못하고 소박한 술이란 뜻에서 겸손하게 박주(薄酒)라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라를 대표하게 되어 국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의 술담그기 문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다.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고구려 개국시조인 동명왕(BC37~BC19)의 건국담에도 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같은 술빚기 문화는 일제시대 때 시련을 맞았다.

1907년 7월 조선총독부는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의 일환으로 ‘주세령’을 공포했다.

이어 1917년에는 곡물수탈을 위해 술을 담가먹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다채롭고 화려했던 전통주의 명맥이 많이 끊겼다.

광복 이후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주세행정은 거의 그대로 유지됐고, 1965년에는 양곡관리법에 의해 쌀을 이용한 술이 전면 금지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런 막걸리가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오찬에서 두 나라 정상이 막걸리로 건배했다 한다.

내년 11월 한국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건배주도 막걸리로 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한류 첨병으로 탈바꿈한 막걸리가 빚어낸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도 예전에 새뜻하지 않던 학사주점이 아니라 깔끔하게 단장한 막걸리 전문점들이 들어서고, 백화점 주류코너에도 막걸리가 자리를 잡았다.

번듯한 바 메뉴판에도 막걸리 칵테일이 올랐고, 한병에 1만원 하는 고급 탁주도 나왔다.

골프장 그늘집에선 냉막걸리가 목축임용으로 인기다.

우리의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히스토리와 추억을 담은 술이다.

농사일하다 밥 대신 먹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부침개에 한 잔이 생각나고, 도심 민속주점 벽에 낙서하면서도 먹기도하는 우리 생활 속의 술이자 문화이다.

와인이 프랑스 요리와 함께 문화적 코드가 되었듯이 이 기회에 우리의 막걸리도 문화상품으로 인식해 ‘세계적 문화콘텐츠’로 날개짓해보는 것은 어떨까.

다만 세계인에게 김치가 ‘기무치’로 소개될 뻔한 기억이 있는만큼 막걸리라는 한글 이름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경주해야 함은 물론이다.
<함성중 사회부장>
hamsj54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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