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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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진, 제주대학교 에너지공학과 교수, 논설위원>



‘차카게 살자!’ 이 표현은 어느 조직폭력배의 문신에 나오는 구절이다. ‘착하게 살자!’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재미로 그랬을 수도 있고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 뜻은 무엇일까? 조직폭력배가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말이다.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의 도움이 되고 친구가 된 테레사 수녀님과 같은 착함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선배님 말씀 잘 듣고 후배 잘 가르치는 정도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내 학생들도 마음 바닥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신이 깔려있다. 그 착함이란 이런 것이다. 나이 든 어르신에게 인사 잘하고, 삼촌이 부르면 얼른 달려가 도와드리고, 잔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으며, 집안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나쁜 마음 먹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내는 것, 뭐 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착한 아이들이 졸업하고 취직이 안되고, 연구실에서 연구비를 받아도 연구를 해내지 못하며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일만 하려고 들고, 졸업후엔 보험 들어달라, 책 팔아달라며 찾아오고 한다. 이건 산업사회에서는 착한 것이 아니다.


산업사회에서의 착함이란 제 몫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 요즘엔 ‘착한 가격’이라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드디어 착하다는 형용사가 무기물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아무튼 착하다는 말은 다 같이 들리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농경사회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아이들에게 심어놓으면 나이가 많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너무도 편리하다. 눈 한번 찡그리면 알아서 설설 기고,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으로 고작해야 머리한번 쓰다듬어 주면서 착하다고 말해주면 충분히 만족한다.


이런 아이들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도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했다면 감격해마지 않는다. 학교에서 지내는 나로서는 이렇게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 학생들이야 경쟁력을 갖든 말든 나로서는 이런 전통적 문화가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그런 철학으로 키워져왔기 때문에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눈살 한번 찌푸리면 설설 기고, 아무런 이유 없이 호통을 치더라도 대들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일을 부탁해도 기꺼이 해주고 이 수고에 대해서 착하다고만 해주면 충분히 만족하는 것을 잘 이용하며 살자는 그런 유혹 말이다.


착하다는 개념은 어떤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한 개념이다. 그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착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평판이야말로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공동체를 벗어나서 삶을 꾸려나간다. 이때는 착하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면접시험을 볼 때 착하다고 해서 점수가 주어지는가? 물론 인성검사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농경사회에서의 착함과는 다른 개념이다. 일을 해내는데 있어서 협력이 가능하냐를 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 더 나아가서는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농경사회적인 착함을 강요하고 그렇게 키우는 것은 이 아이들의 경쟁력을 뿌리째 잘라버리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육지부에 나아가 매우 큰 문화적 차이를 경험한다. 그것을 극복한 아이들은 살아남는다. 극복하기 어려우면 고향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부류는 다시 농경사회적인 착함을 강요하는 기성세대가 될 것이다. 착하다는 것도 이제 개념이 좀 바뀔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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