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몇 차원의 삶을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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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점으로 부산행 KTX는 한 변수로 그 위치를 표현(두 변수는 상수)할 수도 있으므로 1차원 행로의 사물로 볼 수 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에게는 전후좌우는 있어도 높낮이는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세계는 2차원이다. 바닷물고기는 수중이라는 3차원 입체공간을 이용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몇 차원의 삶을 누리고 있을까? 일상적인 무대가 비행기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3차원 삶은 불가능하다. 땅을 벗 삼아 2차원적 삶을 영위하는 것 같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2차원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집에서 출발하여 학교나 직장으로, 다시 저녁 무렵에는 그 길을 거슬러서 집으로 돌아간다. 가끔 그 1차원적 행로에서 벗어나 술도 한 잔 마시고, 노래방에서 고함을 지른 후 집으로 향할 때도 있지만, 그 정도 행로의 삶을 두고 ‘2차원 세계에서 살았다’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고작 다람쥐 쳇바퀴의 생활, 1차원의 공간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비통해 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도 삶의 공평함이 배어있다. 인간은 공간적으로는 2차원 삶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지만, 그 내면세계를 더듬어보면 다채로운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차원’이라는 용어는 공간이 아니고 정신적 세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차원이 높다’는 것은 ‘여러 분야에 경험과 지식이 많고 풍요롭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이전에도 4차원의 과학적 사고와 삶을 구가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사극 선덕여왕에 불상의 등장과 월식의 예언 등에는 과학의 위력이 내재되어 있다. 월천대사는 과학적으로 월식을 예언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했다. 또한, 천문관측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화강암 석조구조물인 첨성대(국보 제31호)라는 역사적 유적이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로 지금도 숨 쉬고 있다. 그 당시에 오늘날의 일기예보에 해당하는 과학적 기초가 태동했다. 선조들은 과학적 예지가 번뜩이는 고차원의 삶을 향유했다.

악의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남을 폄하하고 뒷전에서 헐뜯는 사람, 한 분야에 일로매진도 벅찬 삶 속에서 매사의 시시비비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흙탕물로 만드는 사람, 그리고 평소에 자신이 만든 틀, 누에고치 집을 마음의 액자에 그려놓고 그 세계의 풍경만 감상하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폴짝거리며 뛰어다니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3차원이 아닌 0차원의 존재이다. 그러고 보면 여백을 음미하면서 남을 존중할 줄 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차원이다.

차원이 높은 삶을 영위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 고차원의 세계를 살게 되면 “관조”(사물 등을 고요한 마음으로 관찰.음미함)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높은 차원에서 그보다 낮은 차원의 세계를 관조할 수 있지만, 저차원의 존재가 고차원을 관조할 수는 없다. ‘관조당하는 세계’에서 ‘관조하는 세계’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삶의 목적일 수도 있다.

<변종철 제주대학교 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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