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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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방송이 있기 이전의 원시언론 형태로는 ‘은어서(隱語書)’나 ‘참요(讖謠)’가 될 것이다.
은어서란 고발기사를 널직한 돌이나 나무판 또는 기왓장에 써서 사람이 잘 다니는 곳에 엎어두고 오가는 사람이 보게 하는 일종의 소자보(小字報)다.
또 참요란 노래를 만들어 입과 입으로 구전시키는 일종의 노래방송이다.

학자들은 이런 원시언론이 사람이 공동체사회를 이루고 살게 된 때부터 시작됐을 것이라고 본다.
고려시대 만적(萬積)의 난 때는 이런 기왓장 언론이 큰 영향을 발휘했다.
‘왕후장상(王候將相)이 무슨 씨가 있느냐’고 쓰여진 당시 기왓장 언론은 모르긴 몰라도 요즘의 온.오프라인 언론보다도 더 폭발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개화기 때는 기자(記者)를 고원(告員)이라고 했다.
1894년 독립신문의 고원들은 대낮에 길을 가다가도 꼭지떼들에게 폭행당하기 일쑤였다.
꼭지떼란 감옥소에서 나온 전과자들이 집단화한 부랑배들이다

독립신문 기사에 불만을 품은 정상배들이 이 꼭지떼들에게 돈을 주고 청부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꼭지떼에게 매를 맞아 코피가 터지고 정강이가 꺾어진 고원들의 이야기는 바로 다음날 장안의 입방송으로 짜르르 알려졌다.

그래서 얻어맞아 눈자위가 시커멓게 퉁퉁 부은 얼굴을 한 고원이 거리에 나오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마음 속으로 존경을 보냈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보(濟州新報)가 창간됐을 때 이야기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제주섬에 우리말 우리글로 된 신문이 나왔을 때 제주사람들은 신문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다.

신문 한 장을 이집 저집 돌려가면서 읽는 것은 보통이고 빌려온 신문지가 구겨지면 숯불 다리미로 신문을 곱게 펴서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예의였다고 한다.

당시 기자들은 저녁 술.밥을 걱정하지 않았다.
바바리코트에 그날 신문지 한 장을 옆에 끼고 퇴근하면 어느 식당에서도 식사 값을 신문 한 장으로 대신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기자를 이해하고 신문을 사랑했다.

▲요즘같이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 자존심을 잃어버렸을 때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제 한국신문협회 창립 41주년 기념식사에서도 이렇게 가슴 아픈 반성을 싣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신뢰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다.”
“신문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독자를 두려워하며 언론의 정도를 가는 길밖에 없다.”

이 기념사를 보니 문득, 신문을 ‘양심.약속.진실.정의’라고 부른 사람이 생각나는 것이다.
신문은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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