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사태와 햇볕정책
서해교전사태와 햇볕정책
  • 김홍철
  • 승인 2002.07.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달 29일. 2002년 한.일 월드컵 폐막을 앞두고 벌어진 ‘서해 교전사태’는 대치와 교류.협력이라는 남북관계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서해 연평도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역에서 남.북한의 교전사태로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중대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더욱이 1999년 6월 연평해전 직전 김대중 대통령이 군에 지시한 ‘4대 교전수칙’, 즉 첫째 북방한계선(NLL)을 지켜라, 둘째 우리가 먼저 발사하지 말라, 셋째 상대가 발사하면 교전수칙에 따라 격퇴하라, 넷째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라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 북한 경비정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4대 수칙에 따라 신중하던 우리 해군이 그냥 빤히 보면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교전수칙을 따르다 당했다”라는 말까지 나올까.
기습공격에 취약점을 드러낸 교전수칙에 대한 국방부의 보완도 ‘사후 약방문’이다.
그제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국립묘지로 향한 운구행렬 속,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젊디 젊은 넋들은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
해마다 6월이면 남북관계는 일희일비(一喜一悲)다.
1994년 6월 북한은 ‘서울불바다’론으로 남한을 원색적으로 위협했다. 이후 1999년 6월 연평해전이 터졌고, 2000년 6월에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올해 6월에는 북한의 서해 도발이 있었다.
이 모든 사건들 뒤에는 햇볕정책이 있다.
이 햇볕정책을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발표한 것은 1994년 9월 30일 미국 헤리티지 재단에서 한 연설에서였다. 199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듬해 2월에 있었던 취임사에서 그는 햇볕정책의 핵심이 되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 햇볕정책 응용은 기능주의의 역사나 경험에서 볼 때 최악의 상태에서 적용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구 동.서독의 경우와 비교하면 역사, 정치문화, 분단의 배경 등 측면에서 많은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이 남북관계에 끼친 영향은 구 동.서독이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것으로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산가족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 같은 햇볕정책은 어느 수준에서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안보문제를 양측이 안고 있는 한 여건의 증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햇볕정책이 안고 있는 극단적인 양면은 다름 아닌 경제 교류를 중심으로 한 협력관계와 안보정책을 골자로 한 억지력과 전쟁수행능력이다.
정부가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의 기조를 변함없이 유지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번 사태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된 것은 사실이다.
월드컵 기간에 교전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선수들과 국민들은 전사 장병들을 위한 묵념을 한 다음 경기와 응원을 펼쳤다.
성숙한 시민정신이라고 박수를 아끼고 있지 않지만 분단의 현실을 보는 찜찜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 여기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또다시 어떤 형태로든 북이 선제공격을 한다면 어느 누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 나라를 구할 것인가. 위정자들인가, 아니면 우리의 고귀한 이름인 장병들인가.
통일과 평화시스템, 전쟁수행능력 등 안보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우리에게 불어닥친 새로운 안보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