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동선(夏爐冬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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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갈수록 최첨단 문명의 이기에 묻혀 산다. 그러는 사이 멋스러움과 해학이 물씬 묻어나는 우리 민족의 향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어져갈 뿐이다.
그 단적인 예가 부채. 선풍기와 에어컨에 밀려 그 자취가 희미해진 지 한참이다.
전통부채연구가 등에 따르면 부채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부’자와 가는 대나무라는 뜻의 ‘채’자가 어우러졌다 한다.
예로부터 부채는 어땠을까. 손자 손녀들에겐 하늘하늘 선들바람으로 무더위를 식혀주는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른들에겐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서화가와 장인들에겐 혼신의 땀이 배인 예술품으로 빛났다. 부채는 손놀림에 따라 서로 다른 생명으로 탄생했다.
▲이처럼 삶의 철학이 배어나는 부채의 쓰임새. 이를 집약해 전해지는 것이 부채의 덕목이다.
그 첫째는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쫓아준다. 둘째 모기나 파리를 후려쳐 잡게 한다. 셋째 곡식이나 음식이 담긴 그릇을 덮어준다. 넷째 길을 걸을 때 뜨거운 햇볕을 가려준다. 다섯째 바람을 일으켜 불을 지펴준다. 여섯째 땅바닥에 주저앉을 때 깔고 앉을 수 있게 해준다. 일곱째 청소할 때 쓰레받기가 되어준다. 여덟째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똬리 대신 사용된다. 전통적으로 이를 부채의 여덟 가지 덕목이라 한다.
그러나 ‘저 멀리 방향을 가리켜주는 덕’, ‘여인이 옷을 갈아입을 때 가려주는 덕’, ‘흥겨울 때나 노래 부를 때 장단을 맞춰주는 덕’, ‘빚쟁이를 만났을 때 얼굴을 가려주는 덕’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듯 풍류와 운치를 간직한 부채는 여름에 제격이다. 겨울엔 화로가 제격이듯 말이다.
이와는 달리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옛말이 있다. 여름철 화로와 겨울철 부채라는 뜻이다. 아무 소용 없거나, 철에 맞지 않는 사물이나 재주 등을 비유하는 말로 통용된다.
그러나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은 “여름철 화로도 젖은 것을 말릴 수 있고, 겨울철 부채도 불씨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사용하기에 따라 무용지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로동선’은 당장 필요치 않지만 미래를 준비한다는 뜻과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여름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겨울엔 이듬해 여름을 준비하듯이.
내일은 2003학년도 대입수학능력시험 D-100일이다. 고3 수험생들은 방학을 잊은 채 ‘여름을 이겨야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금언을 실천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름철 화로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 금언은 어찌 이들에게만 해당되랴. 우리 모두의 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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