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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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교육을 받았고 먹고 살만한 돈도 가졌으나 매사에 빈둥빈둥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을 ‘오브로모프 인간’이라고 하고 그렇게 세상을 사는 것을 ‘오브로모프주의’라고 한다.

학자들은 자연에서 멀어지고 휴머니즘에서 유리되어 가는 현대인의 최종 종착역이 바로 오브로모프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 ‘오브로모프’란 말은 19세기 제정러시아의 작가 ‘곤짜로프’의 동명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곤짜로프는 150여 년 전인 1854년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기자(記者)였다.
당시 러시아 황제는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시종무관장인 푸티아닌 해군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 함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곤짜로프는 이 함대를 따라왔는데 당시 그의 르포기사를 보면 우리 문화를 보는 서양인들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르포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 사람들이 모자라고 쓴 것(갓)을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은 투명하여 햇빛이나 먼지로부터 머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것인데, 왜들 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곤짜로프의 이 기사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곤짜로프의 이 기사를 황당하게만 볼 것이 아니다. 그의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서부터 1894~1895년 청일전쟁과, 그리고 1904년 노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양기자들이 격동의 조선 땅을 밟았다.
현대사를 연구하는 우리 학자들이 이들의 기사를 찾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은 주권을 잃어버린 이 시기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복원하기 위함이다.

특히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시기에는 프랑스에서만도 4개 신문사 기자들이 조선 땅에 상주하고 있었고, 그외에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기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이들의 기사가 본국에 송고되어 신문에 게재되기까지는 약 보름 정도 걸리고 있다.
이를테면 청일전쟁 평양전투가 9월 15일인데 9월 30일자에, 노일전쟁 정주전투가 4월 초인데 4월 17일자에 보도되고 있다.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이른바 ‘이재수의 난’(제주항쟁)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의 사이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사건이다.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회장 김영훈)와 천주교 제주교구(교구장 강우일)가 7일부터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1901년 제주항쟁’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많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감이 있는 것은 당시 사건에서 조선인과 서양인의 인식차이를 살펴보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사이에 조선에 왔던 서양기자들이 숭고한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찾아보는 일은 그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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