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원류는 탐라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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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라크’는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한 나라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변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에 ‘수메르인’이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문명의 시초를 다질 무렵인 지금으로부터 4300여 년 전에 우리 고장 제주에는 탐라국을 창시한 고.양.부 삼신인이 삼성혈에서 용출했다. 지금도 삼성혈과 관련 유적이 남아 있어서 잘 보존되고 있음도 특이한 현상이다.

삼 신인이 용출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용출한 이후 정착 과정과 유적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 삼성혈의 신화 속에서 육지부나 다른 나라와는 다른 제주 특유의 탐라문화가 있으니 이를 발굴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삼성혈의 신화에 따르면 삼성혈에서 용출한 삼 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다가 성산읍 온평리 연혼포에서 자주색 목함을 타고온 병랑국의 3공주를 맞이했다. 삼 신인은 세 공주를 맞이하여 각기 배필을 정하고 혼인지에서 목욕 재계하여 혼인을 하고 혼인지 옆 신방굴에서 신방을 차려 인간으로서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온평리에는 물이 고인 혼인지 연못이 있으며 연못 옆에 작은 굴 세 개가 있어서 삼 신인이 신방을 차렸던 신화를 뒷받침한다.
신방을 치르고 난 삼 신인은 수렵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생활을 하기 위하여 정착할 영역을 분할했다. 대개의 경우 고대 국가 형성과정을 보면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여 지배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삼 신인은 활을 쏘아 지배영역을 정하기로 하고 사시장올락에 올라 활을 쏘아 정주할 영역을 정했다.

연혼포에서 벽랑국의 세 공주가 올라 왔을 때도 서양의 역사 같으면 미인을 두고 결투가 있음직도 한데 다툼이 없이 공주를 배정했고, 정주할 영역을 정한 후에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싸움도 있음직한데 다툼이 없었으니 이것이 탐라국 평화정신의 효시이고, 이 정신을 오늘에 계승한 것이 ‘제주 평화의 섬’의 원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양에는 로마에 네로가 등장하여 동방정복과 폭군정치를 할 즈음인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탐라국의 왕자 세 분은 신라와의 교류를 위하여 배를 지어 타고 신라에 이르러 화친을 요구했고, 신라에서는 이들 왕자 세 분을 귀빈으로 정중히 맞이하여 세 분 왕자에게 성주.왕자.도내의 작위를 주었으니 이는 현대적 의미로 볼 때 국제법상 국가승인을 받은 것이며 동시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이고, 국제사회를 형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설적이지만 역사적인 사건이며 이는 제주가 평화의 섬이라 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만약 이때 신라가 제주를 정복해 버렸다면 탐라국도 없었을 것이고 탐라 특유의 문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기가 시작할 무렵 오늘과 같은 국제 교류가 있어서 평화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는‘평화의 섬’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는 동서로 갈리어 냉전체제가 계속 되더니만 옛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제주를 다녀간 후 사유가 어떻든 간에 동서 이념갈등을 일거에 벗어버렸다. 그 후 제주에는 세계 열강의 지도자가 찾는 곳이 됐으니 이 또한 현대적 의미의 ‘평화의 섬’이다.

20세기를 대륙 중심의 세기라 한다면 21세기는 해양 중심의 세기이며, 20세기가 대서양 문화 중심이라면 21세기는 태평양 문화 중심이어서 태평양에 연이은 제주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활동하는 거점이 될 것이기에 제주는‘평화의 섬’이며 이 평화의 섬을 바탕으로 ‘국제자유도시’의 서막이 ‘민족평화축전’으로 열었다는 의미가 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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