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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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 뒤의 따가운 햇살과 언뜻 불어온 한줄기 바람에 대하여 뭐라 말하면 좋을까? 아름답다고 해보았자 그것조차 지나치게 인색한 평일 테니 오히려 아무 말 않는 게 좋겠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느꼈을 테니까.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에 찾아가곤 했던 대학의 도서관에서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곳은 공개열람실이었다.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책꽂이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며 한가하게 책들의 제목을 살피곤 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제목과 장정의 책을 발견하면 뽑아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책에서부터 그렇지 않은 책, 원론적인 책에서부터 개별학문의 세세한 방법에 관한 책, 이해하기도 어려운 전공서적과 교양강좌를 위한 책, 희랍의 희곡부터 1990년대의 소설, 작은 풀에 관해 적혀진 책에서부터 우주의 기원에 관한 책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이다.

도서관을 일컬어 어떤 사람들은 책들의 공동묘지라고도 한다지만 어디 꼭 그렇기만 할 것인가? 우연히 펼쳐든 딱딱한 수학책 한 귀퉁이에서 마음이 여린 소녀가 좋아할 듯한 귀여운 문구를 발견했을 때를, 또 재미로 읽던 소설책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제 삶의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문장을 발견했을 때를 생각해보시라. 그 순간 책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다.

허나 그 시간들은 책의 일생으로 환산한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을 책들은 숨죽인 채로 그저 견딜 뿐, 그러다가 때가 되면 결국 먼지로 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책들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어느 해 여름인가, 도서관의 향토자료실에서 우연히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비좁은 서가의 구석진 곳에 꽂혀있는 책이었는데 너무 작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그런 책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꺼내 펼쳐들었을 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어떤 울림을 느끼는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당시 그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일에 목숨을 걸고 투신한 바보들이 어딘가에는 살았었고, 아직 살고 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영악한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어리석음이 감동을 주다니, 이상한 일이다.

책이란 재미있는 물건이다. 저마다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결국 스러지기 쉬운 종이와 잉크로 환원되는 책 그 자체는 날마다 조금씩 먼지로 변해가는데, 어쩌면 그 속에 담긴 지성마저도 그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끼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만일 제주도가 커다란 하나의 책 박물관이 된다면 어떠할까 생각해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책들의 집을 만드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생각만큼 쉬운 일이 결코 아니겠지만,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책마을이 들어섬으로써 문화예술을 겸비한 지역문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수행한다. 가능한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이와 같은 일들이 수행되고 유지된다면 이는 제주도가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얼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일은 도서관엘 한 번 가봐야겠다. 가서 또 다른 잊혀진 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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