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여주 訓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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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아라동에 ‘기여주 훈장(訓長)’이 있었다고 한다. 기여주 훈장은 그 시대에 흔했던 면훈장(面訓長)이거나 소.돼지를 추렴, 마을 사람들에게 향응을 베풀고 얻은 ‘술 석잔 훈장’이 아니었다. 한 고을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며 향교에서 훈학(訓學)하던 ‘도훈장(都訓長)’이었다.

그런데 ‘기여주’는 그 훈장의 이름도, 아호(雅號)도 아니다. 이웃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일 뿐이다.

‘기여주’는 제주 사투리다. 그 뜻은 파란 눈, 노랑머리의 양(洋) 사람 말로 하면 예스(yes)에 가깝다. 구태여 우리 표준어로 말한다면 “그래”, 혹은 “그렇게 하지” 정도가 될 것 같다.

제주에는 ‘기여주’와 같은 뜻의 사투리가 여럿이다. 이를테면 ‘기영허주.기여게.기여.경허주마.경허주게’ 등등이 그것이다.

어떻든 기여주 훈장은 남을 돕는 일, 옳은 일이면 거절하는 법이 드물었다. 웬만하면 ‘기여주’였다. 금방 쓰려고 준비해 둔 도리깨도 동네 사람이 급히 빌려 달라면 기여주요, 급전도 남이 빌리라면 기여주였다. 일터로 가기 위해 잡았던 낫이나 호미도, 비오는 날 식구가 걸쳐야 할 도롱이나 삿갓도 어쩌다 빌리라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기여주였다.

그렇다고 기여주 훈장은 ‘예스 맨(yes man)’이 아니었다. 좋은 일, 옳은 일에는 ‘예스’였으나 그른 일, 나쁜 일에는 ‘노’였다. 말하자면 그는 ‘기여주’와 ‘안 기여주’를 분간해서 쓸 줄 아는 덕(德) 있는 훈장이었다.

요 며칠 사이 이 나라에는 ‘기여주 대통령’, ‘기여주 국회’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회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을 발의한 것을 두고 국민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선거법 위반 탄핵과 관련한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은 사과하고 국회는 탄핵발의를 거두라는 게 국민여론이다.

이러한 국민적 요구에 대해 대통령이 쾌히 기여주하면서 사과를 하고, 국회도 기여주하며 탄핵발의를 하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그토록 불안해 하지는 않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도, 국회도, 여당도, 야당도 오르지 ‘안 기여주’ 일색이다.

더 큰 일, 더 큰 국사(國事)를 위해 이 시대 정치인들이 기여주 훈장의 ‘기여주 철학’을 덕목으로 삼았으면 어떨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사안에 따라 국회도 대통령에게 기여주해 주고, 대통령도 국회에 기여주해 주며, 야당도 여당에, 여당도 야당에 기여주하는 현명함을 보인다면 정치적 현안들이 슬슬 풀릴 수가 있으련만….

바로 그것이 큰 정치요, 협상이 아닐까. 탄핵발의가 어떤 결과를 낳든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점점 불행으로만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안 기여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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