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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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서 심어다 놘 저 죽도록 모사불언. 계난 서북청년댄디, 응원댄디…남자고, 여자고, 할망이고 그 디 심어간 사름은 그자 무조건 묻도 안허곡 뭇매로…이만이 헌 그 불사르는 깬 장작 그걸로 그냥 무조건 두드려부는 거라마씨. 우리 시어멍은 쉰넷인디 나영 고치간에 막 두드련 그자 목숨만 냉견에 열리레(주 중문면 예래리) 보내부난 열리서 죽어불고, 스물네 설 난 우리 시동생은 생발 알련에 걷질 못허난 집이 고만이 아쟈신디 심어단 죽여불고, 우리 시어멍도 죽여불고 헌디…나가 중문지서에서 잡아간 이틀밤을 자신디…아기 베곡 헌 사름을…그 애기…집이 돌아오란에 소월 나사 낳수다. 경 두드리멍도 등뗑이만 두드린 건 아기 어떵 안 헌데 헙디다.”(강도화씨.81.안덕면 서광리)

“경허연 잡아가난 그 사름덜 어디사 잡아간 처레도 몰란 그땐…끌엉 가부난 저 위미지서에 심어가신지, 서구포더레 가신지 모르는 거라. 경허단 뒷 해엔가…김천(형무소)에서 그 우표가 와서 거기서 복역헌다는 걸 안 거우다. 계난 잡아간 사름은 형무소에 다 보낸 거라…요즘들은 건디 처음에 목포형무소레 갓덴 헙디다. 곈디 편지가 온 건 김천에서라. 계니까 그게…김천으로 옮겨진 거(이감)라마씀. 그때 우리 작은 셋아버지가 군인을 가난 분대장으로 사 뎅겨신디 어떵사 헤신디 그 부락에 있었던 아이덜이 아메도 고치 있었던 모양이라마씨. 계난 이녁 형…그때 꼬장도 형이엔 못 골을땝주. 그땐 비밀이난. 그 형무소 동네 아이덜이 가시난, 그 형무소에 죄인덜을 어떻해시닌 들으니까…아 죄인덜 뭐 눈도 다 졸라멩 물에도 들이쳐불고 헷덴 골앗덴 작은 셋아버지가 휴가 오랏단 고릅디다”(오동구씨.81.남원읍 위미리)

강 할머니는 스물 여섯에 4.3을 맞았다. 임신한 몸으로 1948년 11월 중산간 마을 소개령이 떨어지자 안덕면 창천리로 내려갔다가 경찰에 끌려가 남편을 찾아내라며 닦달하는 경찰에 고문을 당했다. 4.3으로 남편과 친정.시집 식구 5명을 잃었다. 그 후 2남2녀를 키우기 위해 쌀장사, 고기장사, 유채장사, 감자장사 등 가리지 않고 장사를 했다. 4.3 고문 후유증으로 이젠 진통제 없이는 못 살지만, ‘나보단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할머니다.

오 할머니는 4.3 때 남편이 아무 이유 없이 경찰서에 잡혀가 김천형무소에서 죽어버린 후 시어머니와 둘이서 남자 없는 집안을 책임졌다. 소개령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뒤 동네에서 성을 쌓고 함바집에서 2년간 살았다고 한다. 감귤농사를 지으면서 1남3녀를 꿋꿋이 키워냈다. 지금도 귤 따는 일을 의욕적으로 한다. 4.3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두 할머니와 같은 제주 4.3 여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여인들은 무장대가 누군지, 토벌대가 누군지도 몰랐고, 이념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 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떼죽음을 당한 희생자의 가족이자 제주의 여인들이다. 그 여인들은 참화를 딛고 강인한 생활력과 자존으로 오늘날 풍요로운 제주를 일궈냈다.

그런데도 우린 그 여인들이 ‘보편적’으로 4.3의 아픔을 겪었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그들의 역할을 잊으려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기억하는지. 그녀에게 찬사와 영광을 보낸 미국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우린 4.3의 여인들에게 그동안 제주를 지켜온 데 대한 무한한 영광과 경위를 표해야 한다.

이념의 울타리를 치지 말고, 그녀들에게 묻자. 4.3의 참극을 어떻게 겪었는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이 그녀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상생 공존하기 위한 기본 태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4.3의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인 현재의 역사다. 역사의 주체로서 우리는 4.3 제대로 알고 조명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4.3의 여인들에게 묻고 우린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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