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언(直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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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策問)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왕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왕이 국가 현안에 대한 계책을 묻고 이에 답하게 하는 시험이 바로 책문이다. 때는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서슬 퍼런 시절(1611)이었다. 왕은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데 가장 시급한 나랏일이 무엇인가”라는 책문을 냈다. 응시자였던 임숙영(1576∼1623)은 “나라의 병은 바로 임금에게 있습니다”라고 왕의 실정을 비판했다. 광해군은 진노하였고 과거급제는 커녕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직언(直言)의 용기를 높이 평가한 좌의정 이항복 등의 도움으로 그는 4개월 뒤 병과에 급제했다. 급제를 취소하라는 이른바 ‘삭과(削科) 파동’이 그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조선 선비의 불요불굴의 기개가 느껴진다.

▲지난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때다. 이석연 법제처장의 바른 말은 신선했다. 그는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에게 육가가 진언(進言)한 “말 위에서 나라를 얻었다고 해서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중국 사마천의 ‘사기’ 육가전의 고사를 인용했다. 이어 그는 “새 정부는 한나라당 논리로 집권했지만, 한나라당 논리로만 통치할 수 없다”면서 “헌법정신에 입각한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이 대통령을 향해 “어떤 권력자라도 가다 보면 처음과 달리 판단이 흐려지는 만큼 그 때 직언을 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이 처장의 직언은 대통령에게 ‘국민을 섬기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초심(初心)을 잃지 말고 독선에 빠지지 말라는 진언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여권의 지방선거 참패 후유증이 심각하다. ‘네 탓’ 타령의 내부 분열상만 뒤엉키는 모습들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과 총리실 어느 한 곳도 ‘내 탓’이란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다.

그러나 민심은 청와대를 청와대답게, 여당을 여당답게, 정부를 정부답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혼란의 중심을 잡을 사람은 대통령뿐이다. 그 시발점은 바로 측근·연고 중심의 폐쇄적 인사타파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다. 이럴 때 조선시대 과거시험처럼 대통령이 참모들을 대상으로 정국 수습의 지혜를 묻고자 책문을 치른다면 어떠할까. 과연 “모든 원인은 바로 대통령에게 있습니다”라고 직언하는 참모들이 있을까. 있다면 몇이나 될까. 아니면 대통령을 보면 용기가 나지 않아 용비어천가를 읊어대는 참모들만 있을까. 아무래도 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김범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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