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의 ‘파부침주’
허정무의 ‘파부침주’
  • 김범훈 기자
  • 승인 201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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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가 아닌 데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유행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경제계와 문화계, 이젠 스포츠계까지 한마디 할라치면 으레 등장하는 게 고사성어다. 담겨진 의미만큼이나 멋스러워 보이고, 빠르게 전달되면서 오래 기억되는 표현으로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표현할 때 고사성어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수사(修辭)의 달인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정치적 고비 때마다 고사성어로 자신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은 당시 신군부의 하수상한 정국을 대변한 ‘서울의 봄’으로 압권이었다. 지난 8일 박희태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은 취임사에서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의 지혜)’를 활용하겠다고 했다.

▲최고경영자(CEO)들도 위기극복의 지혜를 고사성어에서 배우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 17주년인 지난 7일 ‘마불정제(馬不停蹄·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를 새로운 화두로 제시했다.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부단히 뛰자며 위기의식을 재강조한 것이다.

주력기업인 현대상선의 적자에다 대북관광사업 중단이란 악재로 벼랑 끝에 내몰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연초 ‘승풍파랑(乘風破浪·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 나간다)’으로 난관극복 각오를 다졌다.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며 ‘파부침주(破釜沈舟·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이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힌다)’의 심정으로 중국공략에 올인한 상태다.

서로 뜻은 다르지만 임직원들이 단결해 어려움을 이겨내자는 의지들이다.

▲허정무 월드컵 대표팀 감독은 ‘파부침주’를 출사표로 던졌다. 오는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와 2010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퇴로가 없는 사생결단의 비장한 각오로 이기는 경기를 하겠다는 결연함을 천명한 것이다. 비록 아르헨티나 전에서 어설픈 수비축구로 인한 충격적인 패배로 호된 비판을 받고 있지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제 선수들은 전쟁터의 병사들처럼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먹을 솥도 없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죽으려 나아가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의 각오로 경기에 몸을 던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옛날 ‘파부침주’의 병사들은 계속 승전보를 울렸다. 나이지리아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강팀이지만 초반 분위기에 흔들린다고 한다. 먼저 선제골을 터트리는 것이 중요하다. 태극전사들도 ‘파부침주’의 병사들 못지않게 새벽의 승전보를 울리리라.`

<김범훈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