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두려움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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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두려운 존재다.

샤먼도 물을 이용하여 금기와 제의(祭儀)를 행하며 그래서 민간신앙의 원류가 되고 있고, 노아의 홍수.노아의 방주 또한 그러한 것이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의 민속학자 던데스(Alan Dundes) 교수는 “괴물이 세계의 물을 다 가두었다”, “영웅은 괴물을 죽이고 물을 방출시켰다” 이렇게 인디언 설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월 초파일에는 석가모니 탄생불을 놓고 감로수를 동자불 머리에 끼얹는 관불(灌佛) 또는 욕불(浴佛) 의식을 행하고 있으며, 천주교에서는 성세(聖洗) 또는 세례(洗禮)라는 것이 있다.

물을 통하여 원죄를 씻어 없애고 다시 태어난다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역시‘물’을 가지고 행해지고 있다.

물은 역시 신성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태풍 ‘루사’와 함께 수마가 할퀴고 간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폐허와 허기진 슬픔과 고통뿐이다.

댐은 무너지고 알 수 없는 진흙덩이들은 온 마을을 덮쳤다.

숨통을 잡아버린 것이다.

창세기를 장식한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고 있다.

여호와는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죄상 때문에 취해진 150일 동안의 대홍수를 통하여 온 인류를 멸망시켜 버린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금수들과 함께 네모진 배, 즉 방주(方舟)를 이용해 또 다른 지금의 인류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 대한 제반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그러한 재앙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민간신앙에서 이야기하는 샤먼(무당) 역시 물과 직접 관련되어 나타난다.

러시아인이 퉁구스인을 처음 만난 곳 역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심 1620m-세계 최대)로 이어지는 예니세이 강가다.

이것이 근간이 되어 지금의 샤머니즘의 원류가 된 것이다.

한국적 샤먼 역시 물을 이용하여 목욕재계하는 금기라든가 제의(祭儀)를 통하여 진혼을 하면서 현세적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을 앞에 놓고서야 드디어 생명에 대한 욕구와 갈등을 토로할 것이다.

저승사자 카론(Charon)이 위치한 곳 역시 강물이었던 것 그것이다.

강물은 일반적으로 시간과 세월을 상징할 것이다.

때문에 삶과 죽음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숙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물을 앞에 놓고 두려움을 달래려는 “비나이다” 이러한 의식이 간절했던 것이다.

제주의 민속에서도 설문대 할망이 바다에서 출현하는 예라든가, 유교적 제의 의식에서 술(酒) 역시 물의 변이상징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은 역시 두려움이 전제된 영원성과 회귀의 상징일 뿐이다.

차제에 밝혀 둘 말이 있다. 평온했던 가정이 불시에 재해를 당했다.

그 슬픔, 그 고통 누가 걱정하고 있는가. 얼까지 빠져 자실한 상태다.

정들었던 옛 동산은 간 데 없고 논밭도 찾을 길 없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다.

입을 것도, 잠잘 곳마저 없다고 한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인데 국회는 무엇들을 하고 있는가.

병풍이다 노풍이다 하면서 개판을 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민생을 위해 할 일들이 많은데 같은 내용을 가지고 몇 년 몇 달을 허송하고 있다.

국민들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있는 것이다.

제 코도 닦지 못하면서 비료다 감귤이다 햇볕이다 할 때가 아닌 것이다.

수재민들에게 삶의 의욕과 희망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제 TV 뉴스나 신문 기사들은 지겨울 뿐이다.

국민의 여망, 국민의 여론 하면서 당치도 않는 당론에 얽매어 흥분하는 그들이 한스럽게 느껴진다.

제발 정치적 속성에서 벗어나 하다못해 정화수라도 떠놓고 추석을 보내도록 관심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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