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역사와 함께 한 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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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사고로 되돌아본 제주
2010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어두운 사슬을 끊고 맞은 8·15광복 65주년이자 제주 역사상 최초의 우리글 신문 제주일보가 창간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8·15 광복 한달 보름만인 10월 1일 창간한 제주일보는 해방공간의 혼돈으로부터 국제자유도시와 평화의 섬을 지향하는 제주의 현재까지를 지면에 올곧이 담아내며 제주도민과 함께 울고 웃었다.

도민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며 역사의 충실한 기록자로서의 사회적 소임을 다하려 노력한 제주일보의 역사는 곧 제주의 역사이자 제주도민의 역사다.

제주 역사의 격변 현장과 함께 하며 도민과 숨 쉬어온 제주일보의 지면에 소개된 수많은 사건·사고 가운데 시대별, 사안별로 제주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사고들을 간추려 도민들의 지난 삶과 희비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래 제주의 도약상을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1940년대

본보 창간해인 1945년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해방을 맞은 해로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보(濟州新報)’가 그해 10월 1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창간호에는 미군 진주와 미군 사령관 파우엘 대령과의 회견, 일본군 작전참모와의 회견을 통해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장책,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철수일자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또 일본에 강제로 끌려왔던 한국인들이 광복을 맞아 귀국하려고 당시 일본 해군 수송선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타고 부산으로 향하다 교토 근처 마이쓰루(舞鶴)만에서 폭발, 침몰한 사건을 다뤘다.

1947년에는 미군정 고위 관리들이 모리배와 결탁해 비리를 저지른 복시환(福市丸) 사건과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의 단초가 되는 3·1사건의 전모를 기사와 사설로 도민들에게 알렸다.

좌우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산간 지역 오름에서 일제히 봉화가 타오르며 좌익무장세력이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 11개 지서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4·3사건은 제주 역사의 최대 비극이다.

▲1950년대

1953년 3월 13일 당시 도내 유일의 상설시장이었던 동문공설시장에 화재가 발생해 사망 2명, 이재민 2600여 명, 가옥 소실 480여 세대, 총피해액은 1억7900여 만환에 달했다.

당시 제주신보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화재 현장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돌연한 화재를 당한 상인들은 불꽃이 확장하리라 생각지 못하고 처음에는 발화 점포 부근만을 피해 상품을 이리저리 옮겨다녔다(중략)... 이튿날 아침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화재 터전에는 이재민들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집이 있던 자리로 보이는 잿더미 속을 헤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제주신보는 3월 14일부터 구제동정금품(의연금품) 모집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40년 만에 대흉년이 불어 닥친 1957년 제주도는 전 지역이 극심한 보릿고개로 기아에 시달렸다.

당시 제주신보는 추수한 지 석달 밖에 되지 않은 농촌은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 전분 찌거기 등 가출사료와 톳, 파래 등 해조류로 연명하는 참상을 빚고 있다. 어린이들은 이러한 거친 음식을 소화시킬 일이 없어 심각한 영양실조에 빠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1959년 9월 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사라호 태풍이 제주 전역을 강타했다.

26년 만에 제주를 강습한 초대형 태풍 사라호로 인해 제주지역은 전 부문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주신보는 당시 잠정적으로 태풍 피해를 집계한 결과 제주 지역 인명피해는 사망.실종 11명을 비롯 사상자가 140여명에 이르렀고 6만5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재산피해 규모도 32억5000만환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제주신보는 당시 사설을 통해 ‘사라호 태풍은 일생일대에 한번 있을까 하는 재앙이었다’며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인류애의 척도를 저울질할 수 있다’고 이재민 구원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1960년대

1960년 4·19혁명 당시 제주신보는 28일 사설을 통해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학생들의 양식과 질서에 탄복하였다.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교훈이 되고 이 쓰라린 경험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1960년 5월 25일자 제주신보는 ‘4·3 및 유지사건·양민학살 폭로의 때’ 기사를 대서특필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학살된 양민들이 후세를 위해서도 엄격히 식별되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1968년 8월20일 밤 9시20분께 서귀포 새섬 앞 속칭 ‘망동산’ 앞 해안에 북한의 무장간첩선이 침투했다. 이들은 거물급 간첩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침투한 것이었다.

무장공비들이 고무보트를 이용해 해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잠복하고 있던 기통타격대의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바다에서는 조명탄이 불빛 속에 함포사격이 개시됐다.

뱃머리를 돌려 도주하던 무장간첩선은 결국 우리 해군이 발포한 포탄에 명중돼 격침됐고 무장공비 11명이 사살됐으며 3명은 생포됐다.

이후 1973년에는 우도에, 1974년에는 추자도에 무장간첩단이 침투하기도 했다.

▲1970년대

▲ 남영호 전복 사건을 보도한 1970년 12월 15일자 제주신문 1면.

‘승객 270여명을 태우고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15일 새벽 1시25분께 대마도 서쪽 100km 지점에서 전복, 침몰하여 6명만이 구조되고 나머지 260여명은 실종되었는데 이날 정오 현재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 12월 15일 낮 12시 조금 지나서 우리나라 합동통신이 일본 동경에서 보내온 전문이다.

남영호의 승선자는 총 338명으로 여객정원 302명보다 36명이 더 탔고 본격적인 감귤 수확철을 맞아 감귤상자 등 화물도 160t에 달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남영호의 침몰 원인은 화물 과중적재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최종적으로 326명의 승객이 사망하고 재산피해는 1억700만원(선체와 화물가격)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제주신문은 남영호 참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남영호 희생자 조위금품 접수를 하는 등 유가족 돕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1977년 제주 출신 산악인 고상돈씨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1977년 9월15일 낮 12시50분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그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왼손에는 피켈을 움켜쥔 채 만세를 불렀다.

▲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제주출신 산악인 고상돈씨를 소개한 1977년 9월 17일자 제주신문.


하지만 그는 1979년 5월29일 오후 7시15분 알래스카에 위치한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봉 정복에 성공했지만 동료 2명과 함께 하산하던 중 예기치 않은 눈사태로 인해 숨졌다.

▲1980년대

제주도지역을 종합개발하고, 제주시를 성장거점도시로 선정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 확정 발표된 이튿날인 1981년 12월17일 오후, 천제연에 가설 중이던 현수교가 붕괴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 천제연에 가설 중이던 현수교가 붕괴되는 사고를 보도한 1981년 12월 18일자 제주신문.

천제연 제2폭포 아래에 시설하던 관광용 구름다리가 계곡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 다리 위에서 작업중이던 인부 등이 함께 떨어져 11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빚어졌다.

이날 사고는 현수교 기둥탑을 당겨주는 와이어로프를 지면 아래 맨홀의 정착공과 연결시켜준 연결공이 빠지면서 로프가 풀어져 일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제주신문은 임시취재반을 구성해 철야 취재해 ‘육중한 다리가 순식간에 50M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계곡 암반은 피바다를 이뤘고 교량에 깔린 인부들은 살려달라는 절규로 아비규환을 이뤘다’고 참상을 호외에 이어, 12월18일자 1면과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84년 6월 당시 제주신문은 사회면 머릿기사로 ‘지역 및 도시계획사업 전문기술업체인 대지 종합기술공사는 81년 7월 서귀포시와 도시기본계획 용역을 계약, 개발계획을 짜면서 개발대상지구인 서호동 1432번지 등 10여 필지 2만5000여 평방미터의 과수원과 임야 등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고 보도했다.

이 특종보도는 이후 전국의 언론이 1개월 이상 주요 기사로 보도했고 정치권의 핫이슈로 부각했는데 이 회사 대표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더욱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80년대 후반 제주사회를 뒤흔든 탑동 매립 사업은 1987년 7월부터 시작됐는데 시작 단계부터 잠수회, 제주대학생, 재야, 교수 등이 탑동매립 반대운동에 나섰고 도민대책위가 구성되면서 탑동 불법개발 이익환수투쟁도 전개됐다.

탑동 매립사업은 매립과정에서의 불법성과 특혜의혹, 200억원대를 웃돌 것으로 추산되는 개발이익의 지역환원 문제 등으로 80년대 후반 제주사회의 최대 이슈로 부각됐다.

▲1990년대

1992년 5월20일 제주대 맥킨리 원정대가 제주대학교 개교 40주년을 맞아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 정복에 나섰다가 악천후를 만나 원정대원 6명 중 3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1992년 8월23일 제주시내 한 고교생이 납치돼 살인을 당하는 끔직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납치된 고교생 아버지 회사의 임시 고용됐던 서모씨(당시 32세)로 노름빚에 쪼들려 끔직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제주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경찰은 연인원 1만여 명을 동원해 수사를 벌였고 대대적인 피해 고교생 찾기 운동과 특별반상회가 열리는 등의 진기록을 남겼다.

1994년 8월10일 오전 11시20분께 승객 152명과 승무원 8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제주국제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를 이탈, 폭발하면서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탑승객 전원은 인근 전경부대의 도움으로 모두 탈출에 성공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 1994년 8월 10일 오전 제주국제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를 이탈, 폭발한 후 불타는 대한항공기 모습.


1996년 1월8일 선원 8명을 태우고 고기잡이에 나섰던 성산포 선적 대영호(39t)가 갑자기 통신이 두절돼 실종됐다.

제주해경은 헬기와 경비정을 동원, 제주 전 해상에서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대영호를 찾는데 실패했다.

대영호의 소식을 알린 것은 같은 달 28일.

북한 평양방송이 이날 낮 12시13분께 제707 대영호가 지난해말 제주도 성산항을 떠난 후 북상, 동해의 김책항에 도착했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월북사실이 알려졌다.

1999년 말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000년 1월 공포와 함께 특별법 후속사업이 본격 시행됐다.

특히 같은 해 6월8일 4.3특별법 시행조례가 공포됨과 동시에 진상규명의 첫 걸음인 4.3희생자 신고접수가 이뤄져 제주인 가슴의 응어리로 감춰졌던 4.3이 화해와 상생을 위한 제주 미래의 발전 토대로 거듭나는 첫 단추를 꿰게 된다.

▲2000년대

2003년 10월31일 제주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4.3사건과 관련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표명했다.

국정 책임자의 이 같은 사과로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의 하나로 꼽히는 4.3사건의 매듭을 반 세기만에 풀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2004년 1월15일 치러진 제11대 제주도교육감 선거는 ‘돈 선거’로 얼룩지면서 교육감 당선자를 포함해 후보자 4명이 전원 구속되고 불법선거에 관련된 학교운영위원 등 43명이 구속되고 77명이 불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제주 교육계의 뼈를 깍는 반성이 요구되기도 했다.

2007년 3월 16일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초등생이 실종됐다 39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왔다.

범인은 숨진 초등생의 이웃주민 이었고, 시신이 발견된 곳은 집과 불과 150여 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제주사회뿐 아니라 전국에 큰 충격을 줬다.

경찰은 실종아동을 공개 수배하는 ‘앰버 경보(AMBER Alert)’를 최초로 전국에 내렸으며, 이후 아동 납치 등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2007년 9월 16일 제주를 강타한 나리 태풍은 ‘사상 최악의 물난리’로 기록될 만큼 제주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 제주를 덮친지 꼭 48년이 되는 이날 시간당 100~150㎜의 폭우를 쏟아부으며 대부분의 저역에서 기상관측 이래 1일 최대 강수량을 기록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의 1일 최대 강수량 267.5㎜의 2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태풍 피해 집계 결과 제주지역 인명피해는 사망 13명, 부상 1명이었으며, 재산피해는 1307억4600만원에 이르렀다.

정부는 제주도 전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으며, 도민은 물론 2000여 명의 다른 지역 군 장병이 제주를 찾아 피해 복구에 나섰다.

현봉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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