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모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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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현 수필가/제주수필문학회장>

교육학자이며 역사학자인 장병혜 전 하와이대 교수는 19살 때 꿈과 야망을 안고 미국 조지타운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0년 후 그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중국계 미국인 양각용 지도교수와 29세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1남 2녀를 둔 상처한 12살 연상인 기혼자였고 자신은 처녀로 운명적인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그는 최근에 ‘자녀교육의 지침서’ ?위대한 엄마의 조건? 이란 교양서를 상재하여 화제가 되었다.

장 교수는 결혼한 어느 날 자녀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 했다. “너희들은 어머니가 죽어 불쌍하고, 아버지는 아내가 죽어 불쌍하고, 나는 내가 낳지 않은 너희들을 키워야 하기에 불쌍하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만났으니 우리 열심히 잘 살아보자” 그러나 이미 사춘기에 들어선 장녀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들은 뇌 손상을 입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네 살 난 막내딸은 자기를 두고 가버릴까 봐 한시도 엄마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한편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까지도 모두 아내에게 떠넘기고 자식들의 양육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남편은 전처가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연구와 학문에 몰두했고, 1년에 절반 이상을 출장과 세미나로 집을 비웠다. 그렇다고 “이 아이들과 가정을 버리고 내 개인의 안일과 영달만을 추구할 수 있는가” 번민 끝에 자문을 했다. 결론은 아니었다.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남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의 가치관과 철학을 남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잘 키우는 일에 인생의 우선 순위을 두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자녀들은 그러한 어머니의 넓고 깊은 마음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학업에 정진 한 결과 명문대학 (장녀: 하버드대. 장남: 예일대)을 졸업하여, 아들은 대기업의 CEO로, 장녀는 변호사로 활동 하고 있다. 막내딸은 예일대 입학당시 최연소 (16세) 로 입학하여 대표적인 자식교육에 성공한 어머니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주변에서 왜 어린애를 안 낳느냐고 따가운 질문을 받으면 '나는 원래 애를 못 낳는 여자라고' 말하곤 했다. 남편은 자기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정관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결혼을 했기에 운명으로 여기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딸애의 귀지를 내어 주다가 잘못되어 중이염이 생겼고 병원 치료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원인은 내가 계모라서 일부러 저지른 행위로 오해를 받았다. 오해를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남편이라 충격이 컸었고, 억울한 나머지 죽어 버리려고 차를 몰고 가다 암벽을 받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차는 전소되었고, 자기는 살아서 오늘 까지 살고 있다” 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그는 ‘내 인생에 실수는 결혼이다’고 술회 하고 있다. 양가의 축복 속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여자로써 허점이 없었다면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든 조물주가 노여워 할 것을 염려했을까, 아니면 시기심 많은 엄마들로부터 ‘얄미운 여자’로 낙인 찍혀 질투의 대상이 될 것이 두려웠을까. 여자에게만 주어진 신의 선물인 ‘출산의 신비스러움’을 누려보지 못한 ‘한’ 일까. 이 세 가지 전부일 수 도 있고, 아닐 수 도 있다. 그의 심현의 세계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는 의붓어머니이면서도 생모보다 더 많은 애정을 쏟으며, 남편을 원망하거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는 유유(幽幽)한 덕성, 당당하고 역동적이며 진인(眞人)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친정어머니께 불편한 심기를 털어놓았는데 이외의 응답이 돌아왔다. ‘네 가 선택한 결혼인데 네 스스로 해결하라.’는 타박 성 질책 대신 “남편을 큰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살아 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고, 남편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한 남편의 아내이며, 세 자녀의 어머니로써 기로에 선 딸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준 어머니의 사려 깊은 헤아림이 따뜻하다. 그러나 그 소중한 한마디를 묵살하거나 흘려버리지 않고, 남편을 아들이라 생각하며 새로운 남편 상을 정립했던 것이다. “그는 남편은 바꿀 수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다.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라고 말한다. 자식들에겐 아빠의 존재감을 심어주고, 엄마와 자식 쌍방 관계가 아니라 아빠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일 때 완성 된다고 주문 한다” 사물이나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따뜻한 감정으로 접근하면 선이 악을 지배하게 된다는 인간의 본성을 그는 터득 하고 있었던 것일까.

2000년대 초반 일시 귀국하여 서울에서 ‘고희’(70세) 축하연을 가졌을 때, 40여년 만에 사과(謝過)의 말을 남편으로부터 들었다. “딸애가 중이염이 생겼을 때 오해 했던 일, 미안 하다”고. 장 교수는 전 제3대 총리를 지낸 고 장택상 재상의 10남매 중 셋째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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