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젠 도시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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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산길 가다가 앉기를 잊고, 앉았다가는 갈 줄을 모르네(山行忘坐坐忘行)/소나무 그늘에 말 쉬게 하고 강물 소리를 듣네(歇馬松陰聽水聲)/ 나에 뒤져 오던 어떤 이 나를 앞서 떠나니(後我幾人先我去)/ 제각기 제 길을 가니 그 무슨 상관이랴(各歸其止又何爭).

한라산의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산행의 계절이다. ‘느림의 미학’을 강조한 조선시대 선조때 학자 송익필(宋翼弼)의 ‘산행(山行)’이란 시는 요즘 산을 찾는 사람들도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하다.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일상의 피곤함을 풀기위해 찾은 산에서도 다르지 않다. ‘빨리 빨리’를 도시에 놓아두지 못하고 산까지 들고 온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느림은 게으른 삶의 이정표가 아니고 가끔은 이 시대를 대변하는 넉넉한 삶의 지표이다. 터키 사람들이 하루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수하힐리’다. ‘천천히’란 뜻이다. 말끝마다 “수하힐리, 수하힐리”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격언인데, ‘오늘 못 하면 내일이 있지 않느냐’는 것은 회교 문화권의 격언이다.

우리에게도 느림의 문화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발효식품은 완성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표적인 슬로우 푸드(slow food)다. 가장 좋은 맛을 내기 위해 제각각 요구되는 발효시간이 있듯 도시도 저마다의 속도가 필요하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숙성의 우리 음식문화를 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당당히 적용시킬 때가 되었다.

요즘 서귀포시는 느림의 미학에 빠져들고 있다. 느림으로 대표되는 제주올레로 국내·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서귀포시가 ‘국제슬로우시티연맹’ 가입을 추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슬로우 시티(slow city)’ 운동은 속도가 지배하는 우리들의 도시에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서고 있다.

21세기 지구촌의 대세는 ‘슬로우(slow)’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대신 걷자는 캠페인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리산과 북한산에도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한 ‘둘레길’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 걷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최근 제주올레 못지않게 골목길이 뜨고 있다. 꼬불꼬불 골목길, 이끼 낀 담장, 다닥다닥 붙은 한옥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덕분에 도시마다 앞 다퉈 골목길의 옛 멋을 가꾸고, 골목길에 서려 있는 역사와 문화까지 되살려내고 있다.

충청도엔 낡은 골목길 덕분에 유명세를 탄 달동네도 있다. 충북 청주의 수암골은 얼마 전 방송 종료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촬영지로 등장하면서 요즘 주말에는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반듯반듯한 현대적인 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낡고 허름한 꾸불꾸불한 이곳의 골목길에는 1970~1980년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벽화가 많아 산책하면서 옛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제주시의 경우 현재까지 진행된 ‘제주시 구도심 재정비 촉진계획안’의 구상에 따라 실제로 도시재생사업이 시행된다면, 예전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정다운 이야기꽃을 피우셨고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며 해질녘까지 놀던 추억이 담겨있는 골목길도 함께 사라지게 될 테니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게 될 것 같다.

‘산행’의 결구(結句) ‘제각기 제 길을 가니 그 무슨 상관이랴(各歸其止又何爭).’는 절창(絶唱)을 마음에 새기며, 단풍이 절정에 이를 이번 주말 한라산을 타야겠다. 수하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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