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역사' 딛고 '세계 속의 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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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제주 65년 기획 <1>정치 분야-4.3사건서 특별자치도 도전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한달 보름 여 지난 10월1월, 제주 역사상 최초의 우리글 신문 제주신보(제주일보의 전신)가 창간됐다. 이후 6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올해 지령 2만호를 맞기까지 제주일보는 숨가쁜 격동의 제주사회 중심에 서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증언해왔다.

일본군 무장 해제와 미군 진주, 지방자치 부활과 특별자치도 등 창간호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숙명적 소임을 위해 노력해온 제주일보는 ‘격랑의 제주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령 2만호를 맞아 해방 후 65년간 굴곡 많은 제주의 역사와 치열했던 도민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치와 사회, 교육, 경제, 문화 등 분야별로 조명해보는 기획을 시작한다.

<1>정치 분야

바람 많은 섬, 제주의 해방 이후 현대사는 출발부터 순탄치 않은 혼란과 아픔, 상처와 시련 등으로 점철된 질곡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역사적 비극인 ‘4.3사건’은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과 무관한 도민들의 무고한 희생과 함께 수 십 년간 말못할 억압과 고통의 굴레로 작용하며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이어 6.25 한국전쟁과 4.19 혁명, 5.16 군사정변, 지방자치제 부활 등의 시대적 격동기 속에서 시련을 이겨낸 도민들은 무엇보다 평화와 상생을 염원했다. 결국 ‘4.3 진상 규명’과 ‘세계평화의 섬’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낸 도민들은 이제 세계 속의 제주를 일궈내기 위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4.3사건, 역사적 비극의 연속

1948년 4월3일 인민자위대가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 11개 지서와 우익단체 집을 일제히 공격하면서 ‘4.3사건’이 발발했다. 치안 마비 등의 비상 사태를 고려해 제주경찰감찰청은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해 치안 수습에 나섰지만(제주신보 4월8일자) 끝내 ‘4.3사건’은 무고한 양민 학살이라는 역사적 비극으로 기록됐다.

같은 해 5월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전국적으로 국민 대표를 직접 뽑는 첫 선거였지만 ‘분단을 영구화한다’는 이유로 남로당과 좌익 측에서 반대하면서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에서 2곳이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4.3’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또 한번 제주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당시 군과 경찰이 불순분자 색출을 이유로 예비검속자로 낙인 받은 수백 여명이 제주비행장과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된 후 암매장됐다.

1951년 1.4 후퇴 이후 피난민들이 대거 제주로 들어왔다. 이어 1952년 1월12일 이승만 대통령을 당수로 추대하는 자유당 제주도당부가 결성됐다.(제주신보 1월15일자)

자유당 도당부는 정강정책 등 이념에 따라 조직된, 엄밀한 의미에서 제주도 정당사의 시작이었다. 같은 해 5월10일에는 도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돼 최초의 민선 지방의회가 탄생했다.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당시 선거에서 총 유권자 11만1078명 가운데 85%인 9만9917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선거 결과 자유당 7명, 국민회 3인, 한청 4명, 무소속 6명이 당선됐다.

▲4.19 혁명 이후 정치 격변기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4월19일 불법.부정선거에 따른 전국적인 궐기사태에 직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제주신보 4월26일자 호외)를 발표, 12년 집권의 막을 내렸다.

제주에서도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 중.고교생과 대학생 등이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도지사와 경찰국장 등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 물러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김인홍 도지사는 검찰의 부정선거 관련자 재판 회부에 따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국내 민주주의 발전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4.19 이후 제2공화국 건설을 위한 7월29일 총선거가 실시됐지만 폭력과 선거 방해 사태 등이 빈발했다.

4.19 이후 직접 선거제로 바꿔 12월29일 시행된 도지사 선거에서는 5명이 입후보해 무소속 강성익 후보가 당선됐다. 당시 선거는 지역 연고와 문중(門中)간 싸움으로 전개됐으며 첫 민선 도정을 이끌던 강성익 지사는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으로 의원 면직됐다.

1963년 10월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 결과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당선됐다. 제주에서는 88.6%로 전국 2위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박정희 후보가 63.5%인 8만1422표를 얻는 우세를 보였다.(제주신보 10월17일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어 제6대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각각 7만3158표(지지율 56.5%)와 7만8217표(득표율 53.2%)를 획득, 도민들의 높은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1978년 12월12일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유권자의 86.2%인 18만7526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개표가 완료된 다음날 아침까지도 당선자를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선두가 바뀌는 등 제주도 선거 사상 전례 없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최종 개표 완료 결과 공화당 현오봉 후보와 함께 무소속 변정일 후보가 무소속 양정규 후보를 1271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제주신문 12월13일자)

▲지방자치 30년만에 부활

1979년 10.26 사태에 이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제주에서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종 선거에서 ‘무소속’이 강세를 띠는 정치적 특징을 나타냈다.

1981년 3월25일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무소속 강보성.현경대 후보가 나란히 당선, 집권당인 민정당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최대 이변으로 기록됐다.(제주신문 3월26일자)

1988년 4월26일 시행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에서 무소속 후보(고세진.이기빈)가 여야 정당 후보를 제치며 당선됐는가 하면 1992년 3월24일 제14대 총선에서는 3개 선거구 모두 무소속 후보(현경대.양정규.변정일)가 당선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무소속 강세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한 경우 탈당 후 출마에 따른 것으로, 도지사 선거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정치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가 부활됐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제정으로 기능이 정지된 이후 30년 만에 이뤄진 것으로, 3월26일과 6월20일에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기초의회 선거인 경우 총 43개 선거구(의원 정수 51명)에 95명이 입후보, 평균 1.9대 1의 경쟁률을 보여 전국평균 수준(2.35대 1)을 밑돌았다.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총 17개 선거구에 49명이 입후보해 2.9대 1의 경쟁률을 보인 가운데, 선거 결과 민자당 8명과 무소속 9명이 당선됐다.

▲평화의 섬과 특별자치도

제6공화국 이후 1990년대는 지방자치 부활과 이를 통한 지방정치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전환점이었다.

무엇보다 4.3사건 진상 규명을 통한 해결 노력이 공식화됐고, 이는 2000년 1월12일 4.3특별법 공포와 2003년 10월15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2003년 10월31일 제주를 찾은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의 결실로 이어졌다.

이처럼 억울하게 희생당한 도민의 인권과 명예 회복은 지난 50년 이상 점철돼 온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상생과 화해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됐다.

4.3 해결과 맞물려 제주는 정상회담 개최지로 각광받으면서 평화의 섬으로 각인되기 시작됐다.

1991년 4월 19, 20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간 한.소 정상의 역사적인 제주회담은 냉전 해체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면서 제주의 평화의 섬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급증, 하루 최고 1만5000여 명의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제주신문 1991년 5월3일자)

이후 한.중 정상회담(1995년 11월16, 17일)과 한,미 정상회담(1996년 4월16, 17일), 한.일 정상회담(1996년 6월22, 23일) 등이 잇따라 개최되면서 제주는 세계평화의 섬으로 주목받기 시작됐다.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제주 세계평화의 섬 지정을 공약했으며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1월27일 청와대에서 ‘세계평화의 섬 지정 선언문’에 서명했다. 4.3이라는 시대적 비극이 세계평화의 섬으로 승화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제주의 정치사는 이제 2006년 ‘고도의 지방자치 구현 및 국제자유도시 건설’을 목표로 내건 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앙 지원 미흡과 내부 역량 부족 등으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로 볼 때 특별자치도의 추진 향방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도민들의 몫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있을 제주일보 지령 특집호에서 계속될 것이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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