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正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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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신문의 효시는 1883년(고종 20)에 창간된 한성순보(漢城旬報)다. 10일에 한 번씩 정부에서 발간한 한문전용 관보였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민중계몽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한글 전용한 기념비적인 신문이다. 이를 기념하여 언론계는 1957년부터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했다.


반면에 1898년 발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은 국한문 혼용으로 한자 식자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황성신문의 성가는 일제침략에 저항한 신문으로서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는 데 있다. 일례로 기사삭제를 당하면 일제 탄압상을 알리기 위해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발행했다. 활자의 뒤쪽 네모진 모습만 인쇄된 이른바 ‘벽돌신문’의 탄생이었다.


▲때는 1905년 11월20일 오전 5시. 황성신문의 2대 사장 겸 주필이던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사원 10여명과 함께 일제 헌병대에 구속된다. 우리 언론사에 기념비적인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사전검열을 받지 않은 채 신문에 실려 치안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다.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는 의미의 이 사설은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리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았다.
장지연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저널리즘에 접목시킨 선각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말년엔 친일에 동조하는 우를 범함으로써 실의에 빠져 폭음하며 지냈다고 한다.


▲춘추필법은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역사를 기록하는 논법이다. 공자(孔子)가 중국의 고대 사서(史書)인 춘추(春秋)를 엮은 필법(筆法)에서 비롯됐다. 여기에는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이 있다. 그러나 춘추필법의 핵심은 직분을 바로 잡는 정명(正名)이다. ‘君君臣臣 父父子子’(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부모는 부모,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의 본분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도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면 결국은 사회로부터 버림받는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사회를 정화하는 소금이 돼야 한다. 새삼 춘추필법으로 정명의 노력을 다짐하며 오늘 제주일보 지령 20000호의 아침을 맞는다.
김범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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