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사람님께 告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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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기 제주농협지역본부 부본부장>

사람님!

추운 겨울 건강하신지요?

경제는 어렵고 정치는 혼란스러우니 살림살이는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더구나 저희들에게 제대로 구제도 안 되는 구제역이라는 뜻하지 않은 역병이 돌아 대한민국 온 국민의 걱정과 고생이 많은데 정말이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희들은 사람님에게 예전에는 영농일꾼으로, 때론 중요한 먹거리 공급자로서 그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은 저희들도 난감하고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너무 슬픕니다. 210만 이상의 친구들이 놓고 싶지 않은 생목숨을 죽음으로 끊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전생에 죄가 많아 소로 태어났고 그래서 모든 고단함을 업보로 알고 살아 왔는데, 그 죄가 수미산만큼이나 큰 것인지 살아 있어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차라리 밭을 갈고 우마차를 끌다 장렬하게 산화하면 덜 속상할 텐데, 도대체 왠 날벼락인지.

그런데 사람님! 저희도 억울함이나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존 로크가 얘기한 사람님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생명, 자유, 재산을 우리는 해하여 본적인 없습니다. 오히려 축산소득 6000억원을 얻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고통을 받으니 억울함을 알리고 싶은데, 우리의 신문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 할아버지께서 옛날 사람님들은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금줄을 놓아 외부 사람님의 출입을 막고 온전하기를 빌었다고 하던데 저희들을 위한 금줄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는 오로지 사람님을 위해 축사에 갇혀 가공 사료만 주어도 고맙게 먹고, 살을 붙이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유치원 정원만한 운동장에서라도 뛰어 보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아마 구제역 면역력이 약해진 것도 그런 영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는 메마른 외국산 옥수수 말고 우리 할아버지 때 먹었던 한라산 대초원의 싱싱한 푸른 촐을 침 삼키며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님들은 과거가 힘들었다고 하는데 저희들은 차라리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사람님들은 저희들을 한 가족같이 생각했다고 들었습니다.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요즘 구제역이 문제된 후로 목장 주변을 출입통제 시키고 공항 등 대중시설에서는 소독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님들이 많이 모이는 회의, 행사도 미루거나 취소했다고 들었습니다. 힘든 결단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가지 말라는 데에 가고 방역은 피하거나 건성으로 하는 사람님들이 아직도 더러 있다고 하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에 하나 저희들 주인님인 농가의 불안과 초조감이 고통과 절망으로 바뀌면 그 마음을 누가 달래 줄 수 있을까요. 사람님은 만물의 영장이니 꼭 지켜 주십시오.

김기택님의 시 ‘소’중에 “소의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나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눈으로 말합니다. 눈물이 곧 언어입니다. 저희 눈을 봐주시고 가슴으로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주는 청정지역입니다. 청정지역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구제역 예방을 위해 마음에 금줄을 단단히 치고 치밀하게 대처해 주십시오. 제발 저희를 가족처럼 사랑해 주세요.

저희도 사람님에 대해 가축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다하려 합니다.

내일 모레면 설 명절입니다. 그 날도 저희는 깨끗한 육신으로 사람님의 조상과 가족들에게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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