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한라산 북쪽 하천계곡 가운데 으뜸이란 이 골짜기는 오랜 옛날부터 시인묵객들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1653년 부임한 제주목사 이원진은 ‘무수천-찬시(讚詩)’를 지었다. 광령리의 김영호(애월면의원)도 ‘무수천-팔경’을 노래했다. 이 내의 하류에는 조공천.도근천.외도천이라 하여 고려의 명찰 수정사가 있던 곳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익재 이재현의 글에 “도근천퇴제수방(都近川頹制水坊) 수정사리역창랑(水精寺里亦滄浪) 운운”이라 하였다. 이는 고려 말 불교의 타락상과 제주에 흉년이 들어 육지의 쌀을 학수고대하는 내용을 읊은 것이었다.
최근 제주판과 김치(1577-1625)의 글 ‘한라산 유산기(遊山記)’를 읽게 되어 ‘무수내’의 참뜻을 알게 되는 기쁨을 품었다. 그의 ‘등(登)한라산 절정시’는 도내의 예전 유림들이 모두 암송하여 즐기는 한시다. 제주자연사박물관 현관 공간에 소암 현중화의 글씨가 바로 이 시이니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김치의 유산기에 ‘수철천변신마(水鐵川邊信馬) 이상척촉두견조휘(而上躑躅杜鵑照輝) 어암석지간종일한음(於巖石之間終日閒吟)’이라 했다. ‘무수내 냇가 말 위에서 보는 진달래나 두견새는 바위 사이에서 종일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게 한다’란 구절에서 이 하천 이름의 뜻을 알아 나 스스로 내 무릎을 치고 말았다.
왜 수철천(水鐵川)이라 했을까? 이 말은 곰곰이 나를 골몰하게 한다. 수철은 곧 물과 쇠의 합성어, ‘무쇠’는 바탕이 연하고 빛이 검다. 강철보다 녹기 쉬어 솥.철판.화로를 만든다. 목사 이원진보다 앞서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이 섬에 온 김치판관은 한라산 등산기에 수철천이라 한 것이다. 하천명이 그의 창작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 명칭이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랜 된 표기임은 분명하다. 나는 이렇게 풀이한다. 이 하천 골짜기의 암반 모습이 마치 무쇠처럼 보여서 ‘무쇠내’라 한 것을 후일 한문을 좋아하던 이들의 시정(詩情)에 의해 무수천(無愁川)이라고 표기한 것인데 후일 ‘고유명사로 굳어졌다’고 보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 내는 한라산 정상 서쪽 산자락 해발 1600m의 ‘장구-목’에서 발원하여 섬 안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요리조리 흘러흘러 총 길이 18.30km를 감돌아 바다에 이른다. 이런 긴 골짜기는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은 무쇠로 녹아 흐르듯 바다에 이른 것이 아닐까? 또 동남쪽 ‘어리목-골’과 영실(瀛室) 북쪽, 그리고 서쪽 ‘볼래-오름’이 판상절리와 주상절리로 이루어져 풍광이 매우 수려하다. 이런 절리들도 모두 용암이 내뿜으며 조화를 부린 무쇠 곧 수철(水鐵)의 조화가 아니던가!
무수내는 사시사철 가운데 아리따운 진면목을 보일 때는 무어라 해도 가을이라 하리라. 봄과 여름은 나뭇잎이 무성하여 무쇠처럼 생긴 까막칙칙한 골짜기는 제 모습이 가려져 울퉁불퉁한 남성다운 형해미(形骸美)를 전혀 볼 수 없다. 더구나 겨울에는 하얀 눈이 덮여 무쇠같이 쭉 뻗은 여성다운 각선미를 감상할 수 없다. 제주의 여러 목민관 가운데 가장 문필력이 돋보인 제주판관 김치도 천고마비의 계절에 좋은 날씨를 골라 무쇠처럼 생긴 용함의 멋을 보려고 찾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문장도 유려(流麗)한 것이겠지,
나도 그를 흉내 내어 무쇠천 곧 무수천 냇가를 찾아 애월읍팔경의 제7경인 무수추곡(無愁秋谷)을 다시 음미하며 겨울을 기다린다. 그래야 천백도로의 제8경인 천백설화(千百雪花)를 찾으리라. 아! 한라산 자락 나뭇가지에 핀 하얀 눈송이에 오늘은 취해보리라.
<제주도교육의정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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