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들의 애향을 문화로 승화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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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제주문화원장/수필가>

재일동포! 그들이 지난날 겪은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지극한 애향을 얼마나 새기고 있을까? 새삼스런 얘기 같지만 이는 아름다운 제주의 미래를 위해 주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1910년 일제 식민지 지배 이후 강제징용으로, 혹은 돈을 벌기 위해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 1922년 제주 오사카 간 군대환(君代丸)의 취항으로 더욱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뿐인가.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발로 밀항선을 탄 이들도 4만 명에 이른다. 끌려가고, 먹고 살기 위해 가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고, 울며 고향을 등진 사람들 14만명이 바로 재일동포다.

그들은 강제 노역을 당하고, 값싼 노동자로, 심지어 넝마주이처럼, 폐지·기름걸레·고철을 주워 모으고, 음식물 찌꺼기를 구걸하듯 모아 돼지를 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오사카의 이카이노(猪飼野)라 불리던 마을 모모다니(挑谷).

이곳은 한국인들이 돼지를 키우며 살던 곳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눈물과 한이 서린 그곳 코리아타운(조셍이찌바)엔 제주 사람들로 붐빈다.

재일동포! 그들은 짓밟혀도 질경이처럼 악착스레 뿌리를 내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회사를 세우고, 공장을 세우고, 음식점을 개업하고, 시장을 조성해 장사를 하고, 빠칭코(오락실)를 개업해 큰 돈을 모았다. 억압과 천대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후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으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탄력이 불었다.

온 국민이 활력에 찬 시기, 재일동포들은 고국 방문 길에 나섰다. 입던 옷을 싸 들고 고향을 찾아와 일가친척들에게 나눠주고 잔치를 열고 용돈도 놓고 갔다.

1970년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그들은 마을 회관 신축을 비롯해, 수도·전기·전화·안길 포장·교육기반 시설은 물론, 감귤묘목 보내기 운동을 적극 폈다. 또한 제주 체육 발전에도, 문화 예술 진흥에도, 회의 산업 육성에도 기여한 바가 자못 크다. 제주 경제·사회발전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단성(丹誠)은 세월에 씻겨 빛이 바래고 있다.

지난해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재일 동포들의 삶을 엮은 ‘재일제주인 애향백년’을 펴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은혜에 보답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 수출입 세계 9위의 경제 대국,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는 애향공원을 조성해 재일동포애향탑을 높이 세우고 보은의 등불을 밝힐 때가 되었다. 그게 힘들면 우선 애향관이라도 지어 도내 곳곳에 흩어져 멸실되어가는 애향자료와, 그들이 살아온 행적과 유물을 전시할 일이다. 이는 찾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애향관을 꼭 신축하지 않아도 길이 있을 것이다. 비어있는 옛 제주대학병원 건물을 애향관으로 조성하는 궁리를 하면 될 게 아닌가. 애향자료 전시실, 애향 교육실, 애향인 추모실, 그리고 시민 애향문화 활동 공간을 마련하면, 애향과 보은을 아우르는 문화 공간이 될 것이다. 이는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을 게다.

애향관의 설치는 애향문화 창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재일동포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주고, 제주도민들에게는 보은의 미덕을 일깨우고, 또한 도민 통합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될 터이니, 제주의 밝은 미래를 위한 일석삼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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