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정치·사회적 제주사회 구심적 역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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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제주법화사의 중창과 그 의미를 문헌사, 역사지리학 및 고고학적으로 고찰하는 학술세미나가 5일 제주도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열렸다.

제주법화사(주지 시몽스님)는 이날 ‘고려 후기 제주법화사의 중창과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4회 제주법화사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민현구 고려대 교수가 ‘고려 후기 고려와 원 및 탐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고 김일우 제주문화예술재단 학예연구사와 오상학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성욱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기조강연 및 주제발표 요지와 토론 요지를 소개한다.

▲민현구 교수
‘고려 후기 고려와 원 및 탐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

원(元) 간섭기는 1273년 삼별초 패몰 이후 80여 년간이다. 이 시기 제주는 원의 전략적 요지로 떠오르고, 원의 직할령이 되고, 다시 고려에 편입되는 등 많은 변화와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고려는 제주에 대한 적극적인 시책을 펴 읍격(邑格)을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행정조직을 확대 개편해 탐라의 고려 영속 관계를 분명히 했다. 고려의 이 같은 조치는 제주의 목마장을 바탕으로 한 경제적 성장과 직결되는 것인데, 제주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한국사의 본류로 들어서게 됐다.

▲김일우 학예연구사
‘고려 후기 제주법화사의 중창 배경과 그 위상에 대한 일고찰’

제주법화사 중창은 원종 10년(1269년) 고려 태자 심(諶.고려 충렬왕)에 의해 주도됐다.

그는 원 황제의 원찰(願刹) 조성을 통해 원 황제 세조의 호의를 끌어내 국가의 평화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법화사의 중창을 계획, 추진한 것이다.

이 사찰이 고려 왕실과 원 황실이 신봉하는 관음신앙에 기초한 사찰이고, 남송과 일본 정벌의 요충지인 제주 서남부 해안에 자리한 지리적 위치도 한몫 했다.

그러나 원종의 폐위와 복위를 비롯한 잇단 정세 변동, 삼별초의 대몽항쟁, 제주의 원 직할령 편입으로 원종 14년(1273년) 중창 주도권이 원에 넘겨졌다. 원은 제주 경영을 효과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중창을 주도, 충렬왕 5년(1279년) 마무리지었다.

중창 이후 법화사는 원 전례에 의한 정례적 불사가 거행된 황실의 원찰 역할을 수행했다. 또 제주 몽골족과 토착주민의 신앙 거점이자 고려의 비보사찰 기능도 했다.

그 증거로는 용과 봉황문 막새, 원대 자기, 양질의 고급 청자 등 출토품과 건물의 규모와 형태, 원의 양공이 주조한 미타삼존동불의 안치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사찰의 위상은 법화사로 하여금 종교.정치.사회적으로 제주사회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케 했고, 원은 이를 통해 제주사회 지배를 실현해 나갔다.

▲오상학 학예연구사
‘고려시대 법화사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

법화사 창건에 대한 문헌사료나 확실한 고고유물이 없는 상태에서 장보고 창건설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제주법화사는 입지상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법화사의 산남(山南) 입지는 항로상 문제라기보다는 제주도 내부의 취락 발달과 맞물려 창건.발전되었다. 고려시대 사찰의 분포와 입지를 보면, 제주 산북의 제주목을 중심으로 사찰이 집중됐다.

이는 당시 취락의 중심지인 속현(屬縣)을 중심으로 사찰이 건립됐음을 의미한다. 법화사는 행정구조로 볼 때 산남 중심취락인 예래현과 홍로현의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장보고 창건설 주장자들은 법화사의 입지와 관련, 법화사상의 특성에서 찾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제주도의 남쪽 해안은 중국.일본 사단항로의 중간 경유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화사도 산남에 세워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화사는 해안에서 4㎞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단순히 항해와 관련돼 창건됐다고 보기 어렵다.

또 법화사의 입지에는 용천수와 같은 자연적 조건, 주변 중심취락에 대한 접근성, 도로망, 사원 재정에 긴요한 경지 확보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한성욱 학예실장
‘제주 법화사의 중창에 관한 고고학적 이해’

발굴지점 가운데 금당지(특수건물)는 건물 규모와 중층 가능성으로 보아 중층 극락전으로 추정된다.
건물 안에 봉안된 미타삼존불상과 화광(火光)을 담은 감실(龕室)의 높이와 너비가 각각 7척 쯤 된 것을 볼 때, 극락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 법화사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역사적 상황과 발굴 유물로 미뤄 9세기 장보고 대사에 의해 창건됐을 가능성이 있다.

첫째, 9세기 유물로 개원통보와 일부 통일신라 말 양식의 도기(陶器)가 출토된 것이 한 증거이다.
둘째, 이 시기 제주가 신라와 중국, 일본 등 국제교류의 중간 기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점, 셋째 사찰 근처에 있는 ‘대포(大浦)’의 옛 지명이 ‘당포(唐浦)’인 점으로 보아 장보고 대사와 관련된 유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대찰의 경우 1개 마을 단위로 대규모였던 점을 고려하면, 기존 발굴조사는 미흡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큰 주초석과 기와, 청자가 발견된 현 대웅전 남쪽 능선에 대한 추가 발굴 및 사찰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또 극락전을 중심으로 해 법당이 배치된 강진 백련사, 완도 법화사, 장흥 천관사 등 천태종 사찰과의 비교 검토, 가람의 배치와 규모를 밝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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