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주교역포구로 당포 단정짓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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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 공주대 교수=원종 10년 무렵 원 황실의 원찰을 제주에서 만드는 게 시기상조 아닌가. 사찰의 위상이 원의 원찰, 지역주민의 신앙거점이자 고려의 비보사찰이라는 데 상충된 점이 없지 않다.

△김일우씨=몽고가 남송과 일본 정벌을 염두에 둘 때부터 제주를 주목했고, 원종 9년엔 제주 주변 해로(海路)와 해로를 표기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이로 볼 때 몽고의 요구를 누그려뜨려야 할 입장에 있던 고려 왕실로선, 법화사 중창은 적기라고 본다.

몽고 통치기 동안 제주는 고려와 원에 이중 귀속되는 현상이 벌어졌고, 고려와 원으로부터 이중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법화사의 위상은 원의 원찰이자, 몽고족 가족과 토착민을 위한 종교적 안식처, 고려의 비보사찰이라는 상충적인 위상을 가졌다.

▲정광중 제주교대 교수=고려시대 대외교류시 활용된 산남지역 포구는 얼마나 되나. 서림포, 명월포, 홍로천이 전부인가.
‘대포’는 중국 교역시 활용돼 온 포구로 알려져 있는데, 법화사와 관련성을 부인하는가.

△오상학씨=현재 기록으로 산남지역에서 교류할 때 사용된 포구는 셋뿐이다. ‘당포’를 해석할 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중국과 교역 포구로 볼 땐 ‘당포(唐浦)’, 제주의 마을 신당과 연관해선 ‘당포(堂浦)’로 보기도 한다.
현재로선 고려시대 원의 주 교역 포구로 당포를 단정짓기는 힘들다.

▲강창화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 실장=사찰의 가람 규모를 알기 위해 ‘문지(門址)’확인이 필요하다.
관련 자료를 밝혀 달라.

△한성욱씨=오사카 사천왕사에 ‘도리’는 바닷가 입구에 세워진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제주 법화사의 경우 대포 바닷가에서 사역(寺域)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문지는 대부분 법당과 대칭적으로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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