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이라 이름 짓다
추사,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이라 이름 짓다
  • 제주신보
  • 승인 201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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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에 “사는곳 처지에 비해 과하다” 편지
위리안치, 형식적이었지만 상징성이 공포
유배말 무렵 식수문제로 창천계곡 자주 찾아
▲ 추사는 유배가 끝날 무렵 식수의 불편 때문에 대정현 창천리로 적거지를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창천쪽으로 적거지를 옮기지는 안했다 하더라도 민가에 전해지는 것처럼 창천의 계곡을 자주 찾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사진은 창천-안덕간 계곡.

■ 조용한 마을, 대정
추사의 마지막 도착지 대정(大靜).

 

큰 고요함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고요함은 편안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유배지 대정은 고요할지는 모르나 편안한 곳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동계 정온은 대정을 ‘적막한 귀양지(寂寞之濱)’라고 했다.

 

추사는 이 적막함 속에서 8년 3개월을 지낸다. 대정에서 추사의 1차 적거지는 대정읍성 안동네 송계순의 집이었다. 현재 대정읍 안성리 1657-1번지 부근이다. 추사가 대정에 도착하기 전에 관의 명령으로 미리 집을 수리하여 살림도구와 여러 기물들을 완비하고 노비까지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유배인이 도착하면 당해 고을 수령은 유배인이 거처할 배소와 유배인의 관리를 담당한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지정한다. 그리고 유배인의 유배지 이탈을 감시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마다 이들에 대한 점고를 행하였다. 유배인들은 별도의 노역이 추가로 부과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일단 유배지 안에서는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유배지 군현 경계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유배인에 대한 대우는 유배인의 신분 즉 양반관료층과 일반민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지역마다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했다. 유배인에 대한 기본적인 생계는 유배지 고을에서 해결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고을 입장에서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추사는 송계순이 매우 순박하고 근신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송계순의 집은 안거리와 밖거리로 이루어진 제주도 전통 두거리 집이었다. 추사는 부인에게 “집은 넉넉히 용신?올 만?디을 어더, ?간방의 마로잇고 집이 졍?야 별노 도비도 ? 것 업시 드러?오니 오히려 과?온 듯 ??”이라고 집 사정을 편지로 전하면서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과하다고 하였다.

 

송계순의 집은 추사의 위리안치를 위해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추사는 동생에게 “가시울타리를 둘러치는 일은 이 가옥 터의 모양에 따라서 하였는데 마당과 뜨락 사이에 또한 걸어 다니고 밥 먹고 할 수가 있으니 거처하는 곳은 내 분수에 지나치다 하겠네.”라고 편지로 전했다.

 

제주도에서는 가시울타리 제작용으로는 탱자나무, 실거리나무, 찔레넝쿨 외에도 개탕쉬나무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위리안치라고는 하지만 대개는 도망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유배인의 행동범위를 실제 울타리 안으로 제한한 것은 아니었다. 유배인의 감시 책임은 관내의 수령에게 있었던 까닭에 수령의 성격이나 재량에 따라 유배형은 대개 형식에 그치는 수가 많았다. 추사의 경우도 위리안치였지만 실제로 제주목은 물론 한라산까지도 기행을 하였다. 그러나 비록 형식적이었다고 해도 위리형은 그 상징성이 무섭다.


■ 수성초당·귤중옥
추사는 송계순의 집에서 2년을 머물다가 헌종8년(1842년) 제주도 전통의 이사철인 신구간에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긴다. 현 대정읍 안성리 1661-1인 2차 적거지 강도순의 집에서는 1차 때처럼 위리안치가 계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도내는 물론 도외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미루어 격리조치가 완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계순의 집은 두거리 집으로 비교적 좁은 규모였다. 그러나 2차 적거지 강도순의 집은 손님맞이 방인 ‘손청거리’까지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네거리 집이었다. 게다가 추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어서 내방객들이 많았다. 이들 내방객들은 추사의 적거지를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따로 이름을 부쳤다.

 

이는 추사와 교류를 나누던 제주도 사람 이한우(李漢雨)의 시 ‘추사선생 수성초당에 부쳐(題秋史先生壽星草堂)’에서도 언급된다. 그런가하면 김택영, 황현과 함께 한말 3대 시인으로 불렸던 강위(姜瑋)의 ‘수성사(壽星詞)’라는 시에도 나타난다.

 

강위는 스승이었던 민노행의 유언에 따라 가르침을 받으러 제주도로 추사를 찾아와 그와 3년을 함께 머문다. 이 때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라고 노래하였는데 그가 말한 달팽이집이 바로 수성초당이었다.

 

노인성 또는 남극성 혹은 남극노인성, 혹은 호남(弧南), 호남노성(弧南老星)이라 불리는 수성(壽星)은 우리나라 남쪽의 수평선 근처에서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별이다. 예로부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이 그 별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상서로운 별이라고 하여 서성(瑞星) 혹은 경성(景星)이라고도 하였다. 예로부터 섣달그믐 무렵에 이 별을 보면 장수한다고 하였고 또한 수성이 보이는 해에는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에서 추사는 제주유배 동안에 이 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표했고 심지어 제자들은 추사의 제주도 적거지 명칭을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특히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진 제주도 12곳의 경승지를 가리켜 ‘영주12경’이라고 하는데 이 중에 ‘서진노성(西鎭老星)’은 수성과 관련이 깊다. 즉 천지연 하류, 서귀포구의 높은 언덕 위에 지금은 흔적도 없으나 지난날 서귀진이라는 성이 있었는데, 그 성에 올라 내려다본 경치를 말한다.

 

이 성에 오르면 뒤에는 한라산의 웅대한 모습과 더불어 전면으로는 망망대해가 한눈에 펼쳐지며 작은 섬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불로장수를 상징하는 수성을 바다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橘中屋)’이라고 이름 지었다.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빛은 깨끗하고 속은 희며 문채는 푸르고 누르며 우뚝이 선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므로 나는 그로써 내 집의 액호를 삼는다.(梅竹蓮菊在在皆有之橘惟吾鄕之所獨也精色內白文章靑黃獨立之操馨香之德非可取類而比物吾以顔吾屋)”라고 하였다. 이렇게 귤을 상찬하며 적거지 명칭을 귤중옥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이었던 굴원(屈原)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강도순 집에서 가까운 대정성 남문 근처에는 관에서 관리하는 과수원이 있어서 귤나무가 많았다고 했다. 또한 추사가 귤에 대해 쓴 유일한 글에서도 관원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귤중옥이라는 이름 역시 2차 적거지인 강도순의 집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추사의 제주도 적거지는 ‘수성초당’ 또는 ‘귤중옥’이라는 두개의 그럴듯한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추사는 유배가 끝날 무렵 식수의 불편 때문에 대정현 창천리로 적거지를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영조 때 유배를 왔던 산수헌(山水軒) 권진응의 예를 들며 창천을 얘기했던 추사의 편지로 미루어 창천쪽으로 적거지를 옮기지는 안했다 하더라도 민가에 전해지는 것처럼 창천의 계곡을 자주 찾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양진건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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