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을 조성, 어떻게 할 것인가
문화마을 조성,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조명철 前 제주문화원장/수필가>

문화가 화두에 빈번히 오르내리고 있다. 기쁜 일이다. 문화는 행복을 창조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수출입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행복지수는 케냐 사막의 마사이족과 같다는 보도다. 경제가 행복의 절대 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와 문화가 병행 발전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초부터 문화마을 조성 사업이 시작되었다. 농·어촌에 자연환경을 살린 쾌적한 미래형 마을을 건설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관 주도로 흘러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최근의 문화마을 조성은 그와는 다르다. 기존 마을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살린 문화마을 조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제주엔 문화마을이 꽤 있다. 낙천 아홉굿마을, 법환 문화 역사마을, 신풍 어멍아방 잔치마을, 대평 용왕 난드르마을, 명도암 참살이마을, 월평 문화마을, 사계·구엄 어촌문화 체험마을, 그리고 한경면의 4개 웃드르 문화마을, 서귀포의 8개 정보화 마을 등이 그것이다.


지난번 제주도의회의 2011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문화마을조성사업비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예산의 쓰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은 “선심성 예산이 아니냐”고 따지자 궁색한 답변으로 일관했다는 보도였다. 문화마을 조성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속셈은 저마다 다를 터이다. 그게 표나 힘의 논리에 의해 주어진다면 또한 실패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 것인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마을, 준비된 마을부터 선정하는 것이 순리다.


서귀포시 중문동 하원마을, 300호 미만이던 일제 강점기에도 서당이 4개소나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문촌 혹은 양촌으로 불린다. 그 뿐인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절들도 있다. 존자암(尊者庵)과 법정사(法井寺)와 법화사(法華寺)가 그것이다.

존자암은 부처님 재세시의 16제자 중 여섯 번째인 발타라존자가 수도했던 곳이라 전한다. 고려대장경 법주기에 의한 것으로 한국 불교가 제주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법정사는 무오항일운동의 발상지다. 기미년 3·1운동 보다 5개월 전인 1918년 10월 7일 발발했다. 당시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된다.


법화사는 후기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의 창건으로 추정하는 천년고찰이다. 조선왕조실록엔 법화사에 280명의 노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거니와, 이 절에 봉안된 동불상을 명나라로 가져가기 위해 외교적 마찰을 빚었던 기록도 있다.


특히 하원 산 1번지 영실엔 설문대할망의 아들로 불리는 5백의 거석이 초병인 듯 서있다. 이곳은 제주 창조신 설문대할망의 거처요, 1만 8천신들이 주신을 알현하고 혹은 회의를 여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시사철 샘솟는 영실천(靈室泉)은 신들이 노닐고 신선이 마시던 물이요, 하원(河源)이란 이름을 낳은 것이다.


유불선(儒彿仙) 삼도가 어우러지고, 신화가 질펀한 마을, 발전위원회를 꾸려 미래를 꿈꾸고 있다. 역사 문화의 거점을 이어 순례 길을 만들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꾸민다면 이보다 더 품격 높은 문화마을이 또 있을까?


문화 시민운동과 더불어 주제가 뚜렷한 문화마을 조성에 정책적 뒷받침을 한다면 제주는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보배의 섬이 될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