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친(師親)은 사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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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호 세화고등학교 교장/시인
나마스떼(Namaste)!

‘안녕하십니까?’에 해당되는 인도의 인사말이다. 범어(梵語/Sanskrit)로써, 당신과 당신의 사상, 신앙 등 당신과 관련 되는 모든 것을 존숭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다.

군복무 마치고 복직, 스물다섯 살. 가정방문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흰 가닥이 훨씬 많은, 긴 수염의 노인이 학생의 아버지이었다. 65세. 쉰에 어렵사리 얻은 후사(後嗣)가 중학교 2학년, 우리 반 학생이다. 담임선생을 대하는 학부모의 태도가 상당히 깍듯하다. 오히려 담임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이다. 빈한(貧寒)과 연령차에도 불구하고, 그의 따스하고 바른 범절(凡節)이 돌아오는 길에 온갖 생각에 빠지게 한다. 마흔이나 차이 나는 저 노인과 이 젊은이, 열 살 아래의 제자, 이들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40년 아랫사람에 대한 경어(敬語), 그에 대한 나의 보답은 무엇이며, 그 대상은 누구인가? 아! ‘사친(師親)은 사돈’임을 가르치시려는 혹시 숨어있는 나의 스승 아닐까.

세월이 그 노인에게로 바짝 다가세웠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가 교실에서 야단을 맞았다. 징징 울며, 쉬는 시간에 응원을 청한다. 휴대폰도 쉽게 가세한다. 학부모가 달려온다. 아이의 심리는 곧바로 기세 등등이다. 어디로 가는 걸까. 교육의 주체는 교사인 것을. 문장에서, 주어와 같은데. 열차의 기관차처럼, 교육과정(목표, 내용?방법 및 평가)의 계획 및 실행의 동인(動因)이 그에게서 나오는 것을….

사친에서 사(師)는 선생님과 학생의 인연이며, 친(親)은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인연이다. 어느 것이나 인위적일 수 없다. 부모를 선택 할 수 없고, 자식 또한 마음대로 낳을 수 없다. 하늘이 주는 것이다. 학년 초 교무실 진풍경 하나. 출석부에 들어 갈 명단이 든 봉투를 놓고, 선생님들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하늘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 어느 부부가 옷가게에서 옷을 사고 집에 왔다. 그 옷 속에 비싼 진주가 한 알 들어 있었다. 값을 치르지 않은 진주가 그 옷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값을 치른 물건 속에서 나온 것이니, 그 진주도 구매 된 것이다? 옷값만 지불 한 것이니, 진주는 돌려주어야 한다? 아니면, 하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여, 어려운 형편을 이로써 넘어가 볼까? 빈곤했어도, 그들의 생각은 같았다. 그들은 옷가게로 가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진주를 산 것은 아니다’면서 돌려주었다. 어른들의 일치와 존숭이 아이를 강건(康健)히 키운다는 것이다. 또한, 삶에서 모든 판단의 기준을 교육적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년이 시작되는 즈음, 졸시(拙詩) ‘입학식’에서 서너 연(聯)을 싣는다.



눈빛들 초롱대며/새 시간을 입고서/새롱대며 뭘 찾나

두세 발짝 나서면/길 잃을까 되 보며/새내기들 첫 날에

하늘 아래 땅 위에/땀 주인은 누구인가/혼자 있을 뿐 네가

또 모든 네가 모여/그 수만큼 세상인데,/한가지로 틀을 내랴.....



아이들은 각각 우주(宇宙)이다. 그것을 아우름은 어른들 일이다. 교육의 틀을 어느 누가 한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는가마는, 적어도, 학교라는 교육적 시스템의 주체는 교원이며, 그 역동(Momentum)도 또한 교원에서 나온다. ‘사친(師親)은 사돈’에서, 이 모두가 이루어지기를 합장(合掌)하며….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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