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통하고 배려하면 조금 가난해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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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달자

보통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소심하다고 한다. 내성적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혈액형이 A형인 사람이 많다. 마음이 차거나 냉정하지는 않은데 표현을 하지 않는다.

 

가장 큰 특징은 ‘본심(本心)은폐증’이다. 몸 속에는 진심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지 못한다.

 

한국 부부들은 보통 나이 60세가 넘으면 서로 불쌍해서 산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 있다. ‘더러운 정(情)’이다.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가 싫다고 하면서도 좋은 것이 있으면 아버지께 먼저 드리셨다. 언니들과 그런 어머니를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면 그게 더러운 정이라고 말을 하셨다.

 

저 개인적으로 ‘더러운 정’이 한국인의 안타까운 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에 자식과 어머니를 나몰라라 한 ‘무정한 아버지’=저희 아버지는 장남인데 6·25 전쟁 때 집에 없었다. 어머니는 많은 자식을 데리고 고모부를 따라 피난을 갔다. 그때 8살이었기 때문에 생생히 모두 기억이 난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에 계셨다. 아버지는 마음적으로 광대였다. 가만히 못 있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어머니에 맡기고 서울에 계시다가 전쟁이 끝난 후 집에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언니들과 어머니 앞에서 전쟁 때 못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정미소를 했다. 1950년 당시 정미소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제재소를 했다. 어릴 때 톱밥을 가지고 많이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도가(都家)라고 했는데 술을 만드는 도가까지 돈이 되는 것을 모조리 해서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끝났는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동네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됐다.

 

계속해서 그렇게 지속됐으면 행복했을 텐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

 

▲7명의 딸을 내리 낳아 혹독한 시집살이를 한 어머니=어머니는 나이 15살에 아버지에게 시집을 갔다. 또 맏며느리였다.

 

시할머니는 15살에 시집간 어머니를 첫 날 밤에 찾아가서 “우리 집안에 귀한 자리를 차지했다. 앞으로 아들 셋만 낳으면 그 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15살 신부는 너무너무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딸, 딸, 딸 쭉 딸만 낳아서 제가 7째 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가 3번째 딸을 낳았을 때 시할머니가 아버지를 꼬드겨서 여자를 얻게 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런 식으로 아들, 딸을 수 명을 낳게 됐다.

 

그럴수록 우리 어머니는 입지가 좁아졌다. 무서운 시집살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여자를 얻고, 또 얻고 무려 5명의 여자를 한 동네 두고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살아생전 별 꼴을 다 본 사람이다. 어느 날은 준비해 둔 수면제 70~80알을 먹기도 했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자꾸 말씀을 하시던 ‘내가 니 애비 뒷꿈치를 못봤다’는 말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았으니까 혼자 잤을 때는 새벽에 일어나면 종일 허리가 아프다가도 남편이 들어와서 누군가와 온기를 느끼면서 일어나면 그날은 하루종일 서서 일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부부로 산다고 해도 꼭 마지막이 온다.

 

누가 먼저 가더라도 마지막은 온다. 그 전에 속 시원하게 말을 했더라면 어쩌면 어머니는 행복하게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행복해보지 못한 여자가 있다면 어머니일 것이라는 점에서 저는 자유롭지 못하다.

 

▲공부해라, 돈을 벌어라, 행복해라=어머니는 생전 ‘나 같이 살지 마라’고 자주 주문을 했었다.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제가 다니던 학교를 퇴학시키고 부산으로 보냈다.

 

부산가는 차에 짐을 실어 넣고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첫 번째 너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두 번째 여자도 돈이 필요하더라. 너도 돈을 벌어라. 세 번째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전 그 말을 듣고 잊어버렸다. 고등학교 끝내고 서울로 대학을 간 첫 날 어머니는 하숙집으로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부산을 떠날 때 하시던 그 세 가지를 다시 주문하셨다. 그리고 대학 졸업식때 아버지가 오셨는데 어머니가 보냈다며 흰 봉투를 건네주셨다.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펴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머니의 글씨가 있었다.

 

삐뚤빼뚤하고 침으로 지웠는지 종이는 절반쯤 찢어지고, 받침도 틀리고 한 한 장의 편지였다.

 

달자 보아라로 시작된 편지는 ‘1번 일번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2번 돈도 벌어라. 3번 그래도 행복해라 너의 애미가’ 였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외롭다. 마음을 열어라= 어디서 망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갑자기 망해버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굉장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달이 밝으면 어머니한테 두루마기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사랑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노래를 했었다.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이 노랜데 마지막에는 ‘목이 멥니다’ 이렇게 끝난다. 답답해 죽을 정도로 천천히 불렀다.

 

재산, 여자, 외모 등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목이 멜 일이 뭐가 있느냐. 그 나이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 사무실에 돈을 타러 갔었는데 항상 잠겨있던 서랍에서 일기장을 봤다.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누가 봐도 안 되는 아버지 인생의 고귀한 마음. 거기에는 일기. 돈, 여자, 명예를 다 가진 행복한 아버지는 없었다.

 

외로웠다고 출발해서 마지막도 외롭다로 끝났다.

 

그때 외로움이란 것을 몰랐지만 슬픈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가지면 그만큼 행복한 것이 인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인간은 많은 것을 가져도 외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됐고 문학의 길을 걷는 첫발이었다.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하는 한 구절.

 

“왜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나. 날개가 있다면 어딘가 훨 훨 날아가고 싶다”

 

외로운 것은 병이 아니다.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마음이다.

 

제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듯이. 돈이 많아도, 명예가 높아도, 여자가 많아도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마음이 잘 통하고 서로 서로 배려하고 조금 가난해도 라면도 나눠먹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 남녀가 서로 마음을 헤아릴 때 ‘미안해, 여보’ ‘당신, 이거 고마워’ 별 것 아닌 것에 행복을 느낀다.
한애리 기자
arhan@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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