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는 4·3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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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수필가
H형! 어느덧 제주의 하늘에도 4월이 왔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무척이나 보고 싶습니다.

어릴 적에 이웃에 사시는 형이라 늘 보고 지냈던 얼굴이지만 이제는 기억마저 가물가물 해지고 있습니다. 형은 찌든 가난과 매달마다 경찰관이 찾아와 이것저것 빠짐없이 물어 보고, 동네 이웃에게도 뭔가를 알아보는 등 연좌제 굴레에 묶여 제대로 직업도 가질 수 없어, 어느 날 도망치듯 무작정 상경하여 여태까지 고향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 질곡(桎梏)의 세월이 어언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형의 가슴 속에는 고향은 한이 서리고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땅 이겠죠. 형은 유복자와 마찬가지로 아버님의 얼굴도 모르고, 그 누구보다 모진 보릿고개를 어렵게 넘으면서 성장했습니다.

형이 2살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 때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이 발발(勃發)했습니다. 형의 아버님은 당시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였고, 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늘 자상하시고 형을 끔찍이 아꼈으며, 동네에서는 모두 부러워하는 화목한 가정 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행복한 가정은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열린 제28주년 3·1절 기념식장의 시위 사건에 아버님이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본인의 잘잘못에 대한 변호(辯護)의 기회조차 없이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영남지역 형무소로 이송되어 오늘날까지 생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형의 어머님께서 지인을 통하여 겨우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면회를 했는데, 죽도록 곤 욕질 당한 처참한 모습, 차마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없는 모진 고문으로 초주검이 된 모습에 혼절했다고 합니다.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형도 마찬가지겠지만 4·3사건 당시 부모가 피해를 당함으로 인해 그 자식들은 공부인들 제대로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대부분 어린 나이에 가장으로 남의 일을 하면서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아 가며 성장했고, 연좌제 굴레에 묶여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가 없어 자포자기 심정을 술로 달래다가 주정뱅이가 되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후손들도 많았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가슴속의 응어리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 고통 받고 있습니다.

형! 의지할 곳 없는 객지에서 모질고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억울하고 비통한 나날을 보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으며, 일가친척 없는 타향에서 막노동으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지금도 고향을 찾을 염두도 없는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풍문(風聞)으로 듣고 있어, 형이 살던 옛집을 지날 때 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입니다.

어두움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듯이 정부에서 늦게나마 국가 공권력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과하였고, 구천을 떠도는 영령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드리려고 정성을 다 하여 제주시 봉개동에 4·3 평화의 공원에 영면할 수 있도록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올해는 4·3사건 발발 6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유족에게는 연좌제의 멍에를 씌워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던 억울하고 원통한 통한(痛恨)의 세월이였겠지요. 이제는 속으로 삭이던 눈물을 다 거두고 위령제에 꼭 참석하여 구천을 떠도는 아버님의 영혼이 편안히 영면(永眠)할 수 있도록 원통하고 아픈 마음을 당시 시국 탓으로 생각하시고 훌훌 푸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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