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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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중문고등학교 교감/수필가
TS 엘리엇이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읊은 잔인한 달 4월을 맞아, 4·3의 아픔이 배어있는 ‘곤을동(坤乙洞)’ 집터를 다시 찾았다.

별도봉 산책로에서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가다 우연히 만났었던 곳이다. 제주바다가 앞마당이고 한라산이 뒷마당인 이곳에 1949년 1월 국방경비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집마다 불을 붙였다. 조상 대대로 700년 넘게 살았던 그 터엔 옛 모습을 간직한 연자방아와 야트막한 돌담들이 4·3의 비극을 대변해주고 있었고, 해원의 꽃인 양 노란 유채꽃들이 만개하여 넘실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잃어버린 곳인 ‘원동(院洞)마을’을 만난 것은, 학생들과 함께 간 수련회의 아침 산책에서 였다.

조선시대부터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설촌되어 나그네가 쉬어가던 이곳에, 1948년 11월 제9연대 군인들이 기습하여 60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한 후 시신과 함께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인적이 끊어진 마을 터엔 대나무와 팽나무가 숲을 이루며 지난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바로 지척에서 승용차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아하, 이곳이 바로 평화로 중간지점이었구나. 이후 출퇴근길에 보는 원동마을이 친근하면서도 더욱 애처로웠다.

며칠 전 나는 다시, 조부와 중부의 위패가 모셔진 제주4·3평화공원(Jeju April 3 Peace Park)을 찾았다. 학생들과 관광객들을 태워온 대형버스들이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이별보다 슬픈 것이 망각이라 했던가, 나도 그들이 반가운데 영령들께서는 오죽 반가웠을까. 도내의 6·25 예비검속 희생자와 도외의 여러 지역에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이 모셔진 묘역과 ‘발굴유해봉안관’을 참배한 나는, 평화기념관에서 전시하는 ‘4·3잃어버린 마을’ 특별전도 둘러보았다. 곤을동과 원동마을처럼 폐허가 된 110여 곳 중 절반 정도의 마을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있었다.

특별전에서 만난 서글픈 이름들을 떠올려본다. 오라리 어우늘, 세화리 다랑쉬, 동광리 삼밧구석, 가시리 새가름, 명월리 빌레못, …. 시인 문충성은 4·3의 아픔을 ‘섬 하나가 몬딱 감옥이었주마씸, 섬 하나가 몬딱 죽음이었주마씸’으로 표현했다. 그 난리시국에서 살려고 여기저기 숨은 죄밖에 없었는데….

‘평화의 섬 정착은 4·3 인권교육에서부터, 정부는 4·3 희생자 신고기간을 즉각 시행하라, 4·3 유해발굴에 따른 후속조치를 시행하라’ 등의 주변에 내걸린 현수막 글에서 나는 당국이 풀어야할 과제들이 여전함을 실감했다. 어쩜 위령관 비석에 새겨진 ‘…평화와 상생의 기운을 한 데 모아 진혼의 불을 지폈으니 그 불꽃은 언 가슴을 녹이고 닫힌 마음을 활짝 열리라 자애로운 숨결은 훈풍으로 흐르고 용서와 화해의 꽃은 영원하리니…’ 란 글 속에 당국이 풀어야 할 과제가 상징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시인 엘리엇은, ‘라일락을 죽은 땅에서 키우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굼뜬 뿌리를 봄비가 적시는/ 4월’을 왜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현대인의 고통과 각성, 그리고 삶속의 죽음(death in life)에 대한 의미부여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활을 위한 죽음에 대한 엘리엇의 메시지는, 4·3 영혼들의 죽음 뒤에 오는 후손들의 화해와 상생에 대한 성찰이라 여겨진다.

망각의 눈에 쌓인 겨울은 차라리 평화스럽다지만, 만물이 다시 움트고 싱싱하게 부활하는 4월은 그래서 잔인한가 보다. 삼가 4·3의 영혼들께 두 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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