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질환을 아시나요-기생충망상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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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왕 제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피부과교수
“제 몸에서 직접 채취한 샘플을 동봉하여 보내드립니다. 이 생명체들은 기생충으로서 피부 안으로 파고 들어오며, 가려워 긁으면 전신의 기생충들이 서로 연락하여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중략) 어디에나 숨어 있는데 눈, 위장, 콩팥, 간, 뇌, 척수에도 있습니다. 최근 한 마리가 심장으로 파고들었고, 어제 밤에는 성충이 두 마리로 분할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라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가 진료실로 도착하였다. 42세 남성이 보낸 이 편지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벌레 조각들이 가득한 비닐봉투가 같이 들어 있었다. 이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상담하려고 필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지만 이후 한 번도 병원에 내원하지 않았다.

47세 기혼 여성이 자신의 몸에 있는 기생충을 증명해 달라며 화장지에 무언가를 담아왔다. 현미경 검사를 통해 환자가 가져온 것은 기생충이 아니라 먼지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직접 컴퓨터 영상을 통해 본인에게 확인시켜 주었지만 환자는 어이없다는 듯 필자를 노려보더니 고성을 지르며 진찰실을 나가버렸다.

기생충망상증은 일종의 단일증상 건강염려증으로 환자 자신의 피부에 기생충이 기생한다는 확고한 집착을 나타내는데 인격이나 사고능력의 중대한 이상은 없다. 필자의 경우도 1년에 3∼4명꼴로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드문 병이라 할 수는 없다. 자신이 기생충에 감염되었다는 망상은 너무도 완고하여 전문의가 아무리 기생충이 없다고 설명해주어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생충 감염이 있다고 진단해주는 의사를 찾아 평생 병의원을 전전하게 된다.

심지어 신체의 모든 증상을 기생충 감염이 원인인 것으로 확신하므로 머리가 어지러워도 기생충 탓이고, 배가 아파도 기생충 탓이며, 기분이 울적해도 기생충 탓이라고 말한다. 이들 환자들은 비교적 양심적이고 도덕의식이 강하면서 교육수준이 높음에도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다고 자각하며, 변명과 합리화에 능하고, 편집증적 성향을 보이며, 여자가 남자보다 2배 더 많고, 중년 이후에 호발한다. 과거에 실제로 기생충감염증을 걸렸던 환자의 3%는 기생충 치료를 통해 완치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기생충망상증을 호소한다.

환자들은 피부껍질, 먼지, 부스러기, 과자조각, 머리카락, 헝겊, 쓰레기, 모기, 파리 등을 작은 상자나 종이 티슈에 담아 가지고 와서 이것이 기생충이 분명하다며 검사해달라고 요청하게 되는데 이를 ‘성냥갑징후(matchbox sign)’라고 칭한다. 특정 기생충에 대한 방대한 의학적 정보를 섭렵하고 이를 특화시키거나 과장한 후 장문의 편지나 일기를 작성해서 의사에게 발송하는 경우도 흔하다.

자각 증상은 전신적인 가려움증, 따가움증, 무언가 기어가는 불쾌한 느낌 등이다. 피부소견은 대개 정상이지만 기생충을 꺼내기 위해 자해를 하여 심각한 상처를 만들기도 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몸에서 기생충을 박멸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동적으로 씻고, 기생충약을 반복적으로 복용하며, 잘 기르던 애완동물을 기생충 감염의 중간숙주로 판단하여 유기하거나 없애기도 한다.

치료로는 항정신병 약물이 효과적이지만 진단 과정이 쉽지는 않다. 정신과 전문의가 아닌 이상 일반 의사들은 이 사람이 망상장애를 앓고 있는 것인지 실제로 기생충에 감염된 것인지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더구나 이들 환자의 상당수는 경도의 정신분열증, 우울장애, 강박장애 등을 앓고 있으므로 진단 초기부터 정신과적 상담과 치료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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