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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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자유전공학부
'장자'에는 포정이라는 도살의 달인이 나온다. 19년 동안 소를 잡았더니 칼날이 닳지 않는 경지에 올랐단다.

임금이 그의 소 잡는 장면을 보고서 문득 "놀라운 기술이로다!"라며 찬탄하였더니, 의연히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올시다!"라고 응수했다는 사람. 2천300년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 읽어도 통쾌하다.

하나 포정의 자부심을 염려하는 눈길도 있어왔다. 소를 잘 해체하는 기술에 '도'라는 영예를 부여할 수 있다면, 사람을 잘 죽이는 기술 역시 '도'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장자에게 '도'란 기술적 차원에서 이른 말이다. 이 사상을 일본이 이어받았다. 기술마다 도라는 이름이 붙는 까닭이다. 검도, 유도, 다도, 궁도 등등. 바둑의 수승한 경지를 기성(碁聖)이라 칭하고, 에도시대 전설적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검신(劍神)으로 추앙받는다.

반면 맹자에게 '도'란 윤리와 도덕의 범주에 속한다. '도'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정의를 실천할 때 얻는 이름이지 고작 절륜한 기술에 붙이는 명칭일 수 없었다. 맹자의 사상은 조선이 이어받는다. 개인행동이든 나라의 정책이든 '의· 불의'가 판단 기준이었다. 이 속에서 의병과 의사(義士)가 나올 수 있었다. 안중근은 이런 전통의 마지막 불꽃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된 백선엽 장군의 이력을 두고 시비가 분분하다. 그가 6·25동란에서 거둔 전공은 혁혁하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전군을 통솔하는 참모총장에 오를 정도였다. 그를 두고 명예원수라는 영예를 부여하자는 일각의 주장도 그의 전공만 놓고 보면 수긍이 간다. 그의 무공을 덮을 만한 군인은 현대사를 털어 없을 듯하다.

그런데 그의 출발은 일제하 직업군인을 기르는 봉천군관학교에서였다. 더욱이 그는 잔학한 살해를 일삼은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다. 그는 여기서의 활동에 대해 중요한 증언을 남기고 있다. 일본에서 간행된 자서전에서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간도특설대의 비밀', 1993년)

지금 민족주의를 잣대로 그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제나 지금이나 군인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하다는 점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동포에게 총을 겨눈 사실에 대해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명령을 받으면 복종하고 집행하는 자가 군인일 따름이라는 것. 그가 기술주의 교육, '일본 식 도'의 가치를 훈련받았던 사람임에 주목해야 하리라. 거꾸로 백선엽은 전투의 승패 이외의 잣대로써 자기를 평가하는 데 대해서 (일본 식으로)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맹자는 질문한다. 그런가? 군인은 명령을 집행하기만 하는 기계인가? 그가 총을 겨눈 사람들 속에 자기 동생이 있었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살해했을까? 혹은 그와 동년배로서 학병을 탈출해 독립군에 투신한 장준하와 김준엽은 고작 탈영병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한 터다.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사람이 아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면,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맹자의 눈에 간도특설대의 유능한 중위가 대한민국의 뛰어난 장군이 되었다고 해서, 영웅일 수는 없다.

나아가 노자는 이렇게 권한 바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면 이를 애도해야 하는 것. 전쟁에서 승리하였더라도 상례(喪禮)로서 처우해야 한다."(殺人之衆, 以哀悲泣之, 勝以喪禮處之. '도덕경', 제31장) 그렇다면 누구처럼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는 참괴함 정도는 토로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

일본은 유교국가인 적이 없었다. 그곳은 사무라이의 나라였고, 사무라이는 그저 명령에 복종하는 자였다. 명령대로 처리하느냐 못하느냐, 기술의 수준에 따라 보상이 다를 뿐이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선비는 군주의 명령이든, 국가의 정책이든 스스로 그 정당성을 질문하고, 정당하면 목숨조차 바치는 사람이었다. 백선엽은 일본 식 '달인'일는지 몰라도 조선 식 영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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