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빅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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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어린 아이들 머리통에다 총을 겨눠 쏘아죽여 놓고도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는 놈. “사람은 죽였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라고 내뱉었다는 녀석. 신문을 보니 그에게 극우민족주의자, 정신병자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심드렁하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넘어갔다. 먼 나라의 사건들은 대개 그렇게 지나간다. 이 땅에서도 힘겹고 다급한 사건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 까닭이다.

 

얼마 뒤 그 아비라는 사람이 “그를 내 아들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살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득 숨이 막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서구문화와,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문화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짓을 했기로서니 제 자식을 두고 자살했어야 한다고 차갑게 내뱉은 아비를 보면서, 잔인한 서양사회의 속살을 엿본 듯했다.

 

동양의 전통사회는 달랐다. 춘추시대 중국 땅에 제 아비가 이웃집 양을 훔친 것을 관가에 고발한 자식이 있었다. 그 나라 임금이 자랑스레 ‘우리 백성들은 이렇게 정직하다’ 라며 공자에게 뻐겼다. 공자가 이를 두고, “우리 동네의 정직함은 아비가 자식의 허물을 감춰주고, 자식이 아들의 죄를 숨겨주는 데 있소이다”라고 답했다는 고사가 그 예다(논어).

 

엄혹한 반공법 시대에도 간첩인 아비를 숨겨준 자식을 처벌하지 못했던 까닭도 이런 전통 때문이었다. 정직이라는 ‘직선’이, 부모자식 간의 비호, 또는 불법이라는 ‘곡선’ 속에서 피어날 수 있다고 본 공자의 생각을 주목해야 하리라. 서양에서는 고독한 개개인들이 모여 계약을 통해 사회를 이룬다고 본 반면, 동양에서는 인간(人間)이란 말에서 보듯 ‘사람의 사이’, 즉 관계를 사람다움의 핵심으로 여긴다. 그러니 이 땅에서는 차마 아비가 제 자식을 두고 ‘자살했어야 한다’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자식이 없는 아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득 범죄자가 준비해두었다는 성명서 속에 “부모의 이혼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는 대목이 눈에 밟힌다. 또 “그의 글 속에는 깊은 고독감을 찾아볼 수 있다”라는 분석들에도 눈길이 간다. 그러고 보면 그 녀석은 동아시아의 일본과 한국을 그리워했다고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가정의 화목을 그리워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지금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범죄자를 두둔하려거나, 죄의 탓을 제 아비에게 돌리려함이 아니다. 다만 그의 성장과정에 있었을 지독한 고독과 단절된 환경에 주목할 따름이다. 스웨덴의 한국인 교수 최연혁에 따르면 “북유럽에는 범인인 브레이빅처럼 이혼한 엄마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전체 아동의 15%에 이를 정도로 가족해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가족해체의 증가가 아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결핍, 소외아동들의 정서불안을 낳아 ‘제2의 브레이빅’을 양산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라던 지적에 공감한다.

 

예로부터 환과독고(鰥寡獨孤)라, 홀아비·홀어미·독거노인, 그리고 고아는 국가가 거둬야할 최우선 복지대상이었다. 이게 맹자의 말이니 2300년 전의 일이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도 정치의 급선무는 언제나 가족의 보전이었다. 반면 지금 이 땅은 가족에 대해 무관심하다. 국가나 국민이나 모두 가족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듯하다. 허나 가족은 자연적인 제도가 아니다. 가꾸고 보살펴야 겨우 살아남는 인공적인 공동체다. 전쟁과 기근, 경제적 위기에 가장 쉽게 파괴되는 것이 가족이었다.

 

지금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사태는 국가가 보장하는 물질적 복지만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고독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여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질곡으로 여기고서 탈출하려 했던 가족이, 실은 돈으로는 환산하지 못할 큰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을 되돌아보아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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