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과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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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천도교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권력이 곧 하느님’으로 바뀌거나 ‘돈이 곧 하느님’으로 변질되는 순간, 어떤 종교든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종교사의 교훈이다.

 

신라 제2대 임금의 왕호는 ‘남해차차웅’이다. 훗날 당나라 유학생 김대문은 차차웅이 곧 무당(巫)을 뜻한다는 기록을 남겼다(삼국사기). 신라초기 임금님들은 무당이었다는 말이다. 허나 권력에 취하고 돈과 결탁한 무당들은 힘을 남용하다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자 신라땅의 해가 빛을 잃었다는 설화는 샤머니즘의 몰락을 상징한다(삼국유사).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한 때는 개성의 대사찰에 속한 사병들이 시내에서 세력을 다퉈 전투를 벌일 정도였다. 조선의 건국 명분 가운데 하나가 권력화한 불교의 척결이었다.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조선후기 고을마다 서원들로 넘쳐났다. 시골 선비들의 패악질에 지방 수령들이 곤욕을 치렀다. 흥선대원군이 600여 곳의 서원들을 혁파하면서, “정녕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은 ‘약한 고리’를 치게 마련이다. 조선말기 천주교는 천민들과 양반가 주부들 사이에 은밀히 퍼져나갔다.

 

당시 푸른 눈의 신부들은 천주교를 양말에 비유했단다. 버선이 사람의 발에 꼭 끼어 발을 압박하는 반면, 양말은 누구든 신을 수 있는 신축성에 빗댄 것이었다. 버선이, 계급과 성별로 사람을 차별하는 유교를 상징한다면 양말은 양반상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천주교의 평등한 사랑을 상징한 것이다.

 

개신교는 일제하 3.1운동의 주축이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옥살이를 치른 목사들도 드물지 않았다. 해방 후엔 민주화 운동의 추동력이기도 하였다. 엄혹한 군사정권 아래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교회에서 은신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개신교는 눈부신 성장과 더불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히 초대형 교회들의 행태는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교회를 신도숫자와 연계하여 매매하는가 하면, 제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기도 하고, 부부와 부자간에 교회의 재산 분쟁으로 시끄럽기도 하다. 큰 교회의 목사들 가운데는 성문란과 축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조차 있다.

 

최근 초등학생들 급식을 둘러싼 주민투표가 있었다. 결과에 다급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투표참여를 호소했다. 누군가 “밥 달라고 우는 경우는 봤어도, 밥 주지 말자고 우는 꼴은 처음 봤다”는 촌철살인을 날렸다. 진실은 복잡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의 목사들은 이 투표에 편파적으로, 깊숙히 개입했다. 운동이 금지된 투표일 아침에조차 투표참여를 유도할 정도였다.

 

종교가 특정한 사안을 두고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권력과 결탁하는 일이다. 불교 쪽에서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했는데, 이제는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이 땅에서 명멸하는 종교들의 이력은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주역의 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특정 종교가 왕이나 권력자를 배출할 때나, 사람이 아닌 돈과 권력을 숭배할 때가 실은 몰락의 징후다.

 

초창기 양말의 정신, 그러니까 사람의 발을 감싸던 신축성과 평등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즉 사람이 버선에 발을 맞추는 전도된 사태로 뒤집어지는 순간, 어떤 종교든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는 ‘성경’과 예수의 본래 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헤아려야 할 때다. 눈앞의 힘과 권력이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임은 ‘성경’에서도 누누이 경고하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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