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에 만난 예멘 난민

고승희, 춘강장애인근로센터 사무국장·수필가

2018-06-24     제주일보

6·25한국전쟁기념일이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생략).’ 초등학교 때부터 뙤약볕 아래서 혹은 장맛비 속에서 목청 높여 불렀던 기념 노래가 이제는 추억일 뿐이다.

전 세계가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는, 가장 뜨거운 소식을 생산해내는 국가가 우리나라의 요즘이다. 남북 간의 급물살을 넘어 북미 정상회담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이제는 종전을 이야기하는 때다.

6월 25일. 달력 위 한국전쟁이라는 글자를 보며 초로의 목사님 기도를 떠올린다. “주여 제가 세 끼 식사를 두 끼로 줄이겠습니다. 두 끼 식사만으로 감사하겠사오니 우리나라를 통일시켜주소서! 북한의 주민을 보살피소서!” 그리되길 동의합니다 하는 “아멘”이 쉽지 않다. 내 자녀에게 너의 것 셋 중에 하나를 나눠주라 얘기할 수 있을까? 아니 열의 하나를 주라 할 수 있을까? 끝나지 않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통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라는 생각은 6·25전쟁이 제주도민에게 무슨 의미였을까로 번져간다. ‘나’ 중심으로 보다면 6·25는 뭍의 전쟁이다. 바다 건너 북한군이 왔을까? 아마도 전쟁은 그전에 누군가의 항복으로 끝났으리라. 전쟁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제주도민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는 뭍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국민으로서 한 민족으로서 우리 부모들은 동참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1950년 8월 패전의 분위기 속에서 해병대 3기, 4기가 제주의 청소년 학도병 3000여 명으로 세워졌다. 그뿐인가, 제주도민은 몰려드는 피난민에게 열의 하나가 아닌 자기 가족의 밥상 위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외할아버지 댁에도 한 가정이 머무르고 갔다 한다. 그들이 숨을 고르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하루 이틀이 아닌 한 달 동안 끼니를 나누셨다 했다. 역사 이래 줄곧 박해 받아온 땅 제주에서 살아온 제주인이기에 무너진 이들을 품어 안을 수 있었으리라.

종전을 이야기하는 오늘은 지금껏 동포라 불러온 북한 주민들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내 자식들이 감당해야 할 바를 생각해봄직한 날이다.

또 다른 힘든 소식이 아침 방송을 타고 있다. 예멘 난민 이야기다. 직장 내 젊은 직원들과 의견을 나눴더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불쌍하니 도와야 한다는 의견이 주도적이었지만, 가치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저들을 받아들이면 이십 년 후에 우리 자녀들이 마주해야 할 문제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에 분위기는 반대쪽으로 쏠렸다.

쉽지 않은 문제다. G7 정상회담에서도 풀리지 않는 난제가 아닌가. 다만, 물 건너 뭍의 피난민을 품어 안았듯이, 예멘 난민을 품어 안을 수 있지 않을까 넌지시 말을 건네 볼 뿐이다. 예멘이 너무 먼 나라라는 주장에 우리 조상들은 일제 강점기에 무명 저고리 입고 멕시코까지 갔다는 대답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염려하는 이들에게 잠시만, 어떠한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만이라도, 저들에게는 우리의 넓은 품을 내어주길 제안하고 싶다. 힘겨운 저들이 숨 고를 수 있도록 다시 일어설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