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음악처럼, 포구에 기대어

(15)월평포구(下) 계절마다 섬은 마법 같은 시간 풀어놓아 제주를 담은 시 한 편, 음악 한 곡 바다 위에 울려퍼져

2020-12-10     제주일보
차분하게

이 섬의 신비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계절마다 섬은 마법 같은 시간을 풀어놓습니다. 봄이면 노란 유채 물결이 섬을 흔들고 오름 위를 물결치는 억새는 심장을 멎게 합니다. 할퀴고 간다는 표현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또 제주의 겨울바람이고요. 자연의 섭리란 어디든 다 비슷하겠지만 섬에서 보내는 사계절에는 원초적인 눈부심이 살아있습니다.

 

섬에서 나고 자라도 섬은 늘 그리운 존재입니다. 가까이 있어도 자꾸만 걸음을 불러내니까요. 그렇게 떠나온 곳에는 눈 시린 쪽빛 바다와 검은 돌담, 한라산에서 곶자왈을 지나 해안에 이르는 자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참 고마운 존재 같습니다. 무작정 길을 떠나도 언제나 늘 거기에 있으니까요.

 

섬이 더욱 특별해진 순간은 또 있습니다. 흐드러진 꽃밭 안에서 어느 시인의 시집을 건네받은 날. 그녀의 시는 눈부셨고 아련했고 쓸쓸했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섬에 뿌리내린 돌 하나,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을 예술로 피워낸 였죠. 시인의 눈이 그토록 부러웠던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제주의 자연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 준 시인들. 고향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 한기팔 선생님도 그 가운데 한 분이시죠. 우리에겐 보목리의 시인으로 더 유명한 분입니다. 정민자님의 목소리로 옮겨낸 선창이 포구 위를 흐릅니다.

 

외등(外燈) 하나 외롭게 서 있는 선창이 있다.

이따금 지나는 윤선소리에도

 

부우옇게 울려오는 선창이 있다.

!이처럼 허전하게 돌아서야 한다면돌아서서 이처럼 억울한 것이면

묶인 채로 뒤척이는 바다 옆에서

온 밤을 불을 켜는 선창이 있다.

 

- 한기팔선창전문

 

섬은 홀로 떠 있기에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고 삽니다. 끝없는 바다 앞에서 이유 없이 고독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 그렇게 너무 외로우니까 등대 하나 세우고 불을 밝히는 것이겠죠.

 

이관홍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했나 봅니다. 그 심경은 외롭게 서 있는 선창이 되었다가 뒤척이는 바다가 되었다가 온 밤을 불을 켜야 했을 정도니까요. 아무래도 이 시의 깊이는 포구 앞을 수없이 서성이던 시인의 발걸음 수만큼 아름답게 표현된 것 같습니다.

 

국악인

바람난장은 시 한 편 음악 한 곡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습니다. 이관홍님은 연주곡으로 광화문 연가(알토색소폰)’, 전병규님과 현희순님은 취타(소금·장구)’를 들고 나왔습니다. 저마다 월평포구에 어린 이해와 감정을 독백하듯 풀어냅니다. 볼 때마다 늘 마음을 흔드는 무대. 음악가에게 악기란 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요.

 

바람이 붑니다. 차고 시린 칼바람이 포구를 삼킬 듯 불어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섬에서 바람을 맞지 않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글쎄요, 다른 섬은 그럴 수 있을지언정 제주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삶에도 예술에도 바람의 무늬가 새겨진 곳이 이곳, 제주라는 섬이니까요.

 

이정순님의

이정순님의 오카리나 연주 바람이 가슴을 후비듯 들어옵니다. 길고 가늘지만 강렬한 여운을 끝까지 지켜내며 가슴 한 구석에 있는 시련과 아픔을 다 토해냅니다.

 

차분하게 한 해를 돌아보게 하는 요즘이네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오래도록 사랑하고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되묻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겨울이 다 가기 전, 다시 포구를 찾을 것만 같습니다. 섬을 사랑하는 그녀의 시 한 편, 가슴 속에 품고서...

 

※올해 마지막 바람난장은 12일 오후 5시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문화공간 항파두리에서 열립니다.

 

사회- 정민자

그림- 홍진숙

사진- 허영숙

영상- 김성수

시낭송- 김정희

음악- 이관홍 전병규 현희순 이정순 윤경희

-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