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농업생산체제전환... 감귤산업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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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제주감귤 먹을 수 있도록 하자”
강창학씨, 우리나라 최고의 감귤재배 선구자로 활약
일본 방문 후 도 전역에서 재배가능하다고 결론 얻어

나는 1963년 1월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일본의 선진농업체제를 시찰하면서 육지와 달리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도는 앞으로 경제적 소득을 높일 수 있는 특용작물 위주로 농업생산체제를 바꿔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제주농민들이 재배해야 할 작목으로 감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감귤은 제주도와 위도상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일본에 대량 생산을 하면서 고소득을 올리고 있었고 제주도 역시 일부 농민들 중심으로 감귤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감귤은 제주도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 희소가치가 있는 농업작물이라는 점에서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전 국민이 사과를 즐겨 먹듯이 제주도 감귤을 전 국민이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의 농민들이 재배하는 경제작물로는 맥주맥과 고구마, 유채가 대부분이었고 보리와 콩, 조 등 밭작물 중심의 농업생산체제였다.

 

이 같은 밭작물은 제주도의 식량자급 차원에서 꼭 필요한 작물이었고 제주도 토질에 맞는 작물이기도 했다.

 

더욱이 경지면적도 작고 농가당 경지면적도 1ha가 되지 못할 정도로 영세한 수준이었다.

 

농기계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농작물운반도 등짐을 지거나 우마차에 의존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제주도를 방문했던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힘들게 등짐을 나르는 제주도민들을 보고 딱하게 여겼던지 80여 대의 리어카를 보내와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에 나줘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1963년 2월 혁명정부 상공부차관이었던 공군소장 박충훈씨가 상공부장관으로 승진했는데 그의 부친인 박종실씨는 내게 가뭄이 들 때는 조를 심어야 한다고 내게 조언을 해줬던 기억도 있다.

 

귤은 제주 특산품으로 조선시대에는 임금에 올리던 진상품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지사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감귤산업은 미미했고 일본의 감귤농업에 비해 재배도 원시적이어서 종묘도 개량화 하고 재배관리법도 과학화하는 일본의 야마구치 시즈오카처럼 선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알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서귀포에 일본 온주밀감을 가져와 심어 재배했으나 일본 감귤에 경쟁력에 뒤져 큰 빛을 보지 못해 일부 농가만이 감귤에 관심을 갖고 일본에서 묘목을 들여와 재배하고 있었다.

 

나는 제주 감귤산업의 처음을 열었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끈 제1일의 공로자로 서귀포의 강창학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강창학씨는 내가 도지사 재직 당시 감귤산업의 발전 방향에 대해 강의도 하고 정책적 조언을 아끼지 않은 감귤농민이자 감귤연구가 감귤농장 경영자로 우리나라 최고의 감귤전문가였다.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감귤농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그의 농장은 늘 정부요인들이 방문하는 관광시찰코스이기도 했고 제주도를 찾은 정부요인들을 맞아 대접하는 일도 늘 그의 몫이었다.

 

특히 강창학씨의 농장에 세워진 전망대는 서귀포 일대를 조망할 수 있어서 특별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강창학씨는 감귤사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 직접 감귤육묘 사업을 벌여 감귤농가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감귤산업만 놓고 봤을 때 강창학씨가 제주도 감귤산업 정책을 주도하고 오늘의 발전을 이끈 선구자였던 것은 틀림 없다.

 

강창학씨는 나와 함께 일본에 시찰 갔을 때도 일본 선진 농업 현장을 둘러보며 많은 지식과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고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제주도 감귤재배에 획기적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만 해도 감귤은 서귀포를 중심으로 한 남쪽 일부지역에서만 감귤재배가 가능한 것으로 봤으나 일본을 보니 제주도 전역에서 재배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기도 했다.

 

그는 제주대학교가 국립으로 승격되면서 제주대 농과대학을 서귀포에 유치하기 위해 교지 매입금으로 1백만원을 기탁한데 이어 1963년 남제주군 보건소 건립 대지 1570여 평을 희사하기도 했던 것으로 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강창학씨의 농장을 방문해 제주감귤의 발전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고 혁명정부의 장관들도 강창학씨가 설명하는 제주감귤의 발전 가능성에 매료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박 의장은 다른 지역 농민이 식량 증산에 힘쓰고 있을 때에도 제주도 농민들은 식량증산보다는 감귤 생산에 매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방침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 때부터 감귤사업에 정부시책으로 금융 지원을 해주고 일본산 감귤수입을 억제시켜 제주산 감귤의 판로를 보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혁명정부와 제주도에서 감귤산업에 대한 각종 지원책을 제시하자 도민들도 감귤재배에 의욕을 갖고 육묘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일본산 묘목을 대거 들여오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산 감귤묘목의 수입에는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의 지원과 관심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제주를 찾아 재일동포들이 기증하는 감귤묘목에 대해서는 종묘법을 개정하서라도 제주도에 한해 통관조치 하도록 특별 지시함으로써 감귤 진흥사업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안다.

 

이로 인해 재일동포 감귤묘목 기증 운동 붐이 일었고 이는 동포사회에 고향 돕기 운동으로 이해됐다.

 

이제 감귤은 제주도의 상징이 됐고 품종도 많아졌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일이 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특히 감귤이 우리나라 전체 과일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발전한 것을 보니 내가 50년 전 전 국민이 즐겨 먹는 과일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제주도민들이 확인시켜 준 셈이다.

 

이와 함께 제주도 감귤은 남과 북이 통일되면 더 빛을 볼 수 있는 과일이 될 것입 틀림 없고 지금의 과잉생산문제도 통일이 되면 오히려 더 증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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