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토속신앙,그 신당의 유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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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前 제주학생문화원장/수필가

내 어릴 적 동네 한가운데 ‘남밑’이라는 신당(神堂)이 있었다. 팽나무의 우람한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하늘을 가렸고, 크고 작은 잡목들이 병풍을 둘러친 듯 빼곡하게 자라나 주위의 시선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별천지 같은 성소(聖所)였다. 어머니는 바구니에 제물(祭物)을 싸들거나 때로는 천 조각에 지전(紙錢)을 준비해 이 신당엘 자주 드나들었다. 가정의 대소사를 치르고 난 후, 어려운 가정사를 앞두고 당신의 소원을 빌거나 만사형통을 기원했을 듯싶다.

 

한 번은 짓궂은 개구쟁이들과 함께 어울려 어른 몰래 그 곳에 들렀다. 알록달록한 천 조각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흰 종이와 실타래로 돈이 묶여 걸려있었다. 주위에는 밥과 과일들, 촛농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촛대와 타다 남은 양초도 꽂혀 있고.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타날 듯싶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오한 같은 으스스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간 큰 녀석들은 돈을 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과일까지 주워 먹는 용맹스러움을 내보였다. 그들의 행태가 한 편 부럽기도 하면서도 당장이라도 신이 해코지 할 것 같은 생각에 난 그만 뛰쳐나왔다. 며칠을 두고 신을 모독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론 그 곳을 스쳐 지나는 일마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마 전 제주신화유적 답사 일행에 끼어 와흘 본향당, 송당 본향당, 신천 현씨일월당, 새콪할망당, 칠머리굿당… 등,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자연의 품속, 으슥한 곳에 자리한 신당의 모습은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려 새로운 감회에 젖게 했다. 원색의 천 조각으로 성소(聖所)를 치장한 모습이며, 거목(巨木)들의 우람한 용트림은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였지만 개발에 찢겨 흔적만 겨우 유지한 곳, 신들이 거처하기에는 문명의 소음이 너무 시끄러운 곳도 있었다.

 

“무병(巫病)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었던 처녀 현씨, 천형(天刑)을 안고 생을 이어가야 할 누이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기 위해 고운 치마저고리 한 벌 지어주려고 뱃길에 나섰다가 풍랑으로 죽은 오라비, 그 오라비를 기리며 애통하게 죽어간 누이…. (양영자의 신천 현씨일월당)” 실존의 이야기라지만 지금까지도 동네 사람들은 이 신당에 드나드는 듯, 원색의 고운 한 복이 훤칠한 거목의 허리에 친친 매어 있었다.

 

딸이 시집 갈 때 여벌 한복을 짓고 이 신당에 바친다니 한 처녀의 애달픈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아름다운 인간애의 발로가 아닌가. 가엾은 넋을 위로하는 그런 행위들이 복으로 되돌려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바람과 그에 따라 일어나는 우연찮은 행운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야기로 구전(口傳)되고 찾는 사람도 많아져 자연스레 신당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 운명에 이끌려 살거나 절대자라 믿는 신의 힘에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조상들의 순수한 토속신앙이다.

 

이곳 제주는 1만 8000여 신들의 고향이라 하지 않은가. 마을마다 한두 곳의 신당이 있고, 지역이나 가문에는 설촌 유래나 명가의 전설이 신화처럼 회자되기도 한다. 그 속에 내재된 신들이 현존하는 인간사에 개입하여 좌지우지 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오랜 세월을 딛고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또 이것들은 때때로 숭조와 애향심의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 신화나 전설 속의 신당들은 미신타파라는 지난 시대의 호된 격랑을 헤치며 명맥을 유지해 온 것들이다.
이제는 그것들을 복원하고 재조명해 우리의 아름다운 토속문화의 한 부류로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리란 생각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 면면히 살아 숨 쉬며 민초들의 애환과 정서가 녹아 있는 신당문화·자연과 유리될 수 없는 원초적인 인간의 삶의 진실이 그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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