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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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한국문학정신제주지부 총회장/수필가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요즘 날씨는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리게 하더니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서둘러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냥 늑장을 부리다 기적이 울린 뒤에 허둥대며 짐 보따리 챙겨 들고 마지막 차에 뛰어오르는 어쭙잖은 승객 같습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구름도 흘러가고, 이따금 찬바람이 한 차례씩 훑고 지나갑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잎을 매단 앞마당의 감나무도 덩달아 수런수런 몸을 뒤챕니다. 바람소리에, 수런거림에 허리께가 허전한 듯도 합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고는 무심히 이 마른 바람의 계절을 넘기기가 쉽지 않을 듯도 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석굴암의 산사를 찾았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까운 거리라서 가벼운 등산 코스로 다녔는데,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는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 아흔아홉 골의 풍경은 마치 다른 세계를 보는 듯 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등산로에 늘어선 아름드리 황솔과 단풍나무에서 지나는 가을의 아쉬움을 느끼며, 떨어진 낙엽이 쌓인 길을 걷다 보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어떤 고운 선율보다도 더 아름답게 들려왔습니다.

 

석굴암 암자에 도착하고 주지스님이 이곳을 찾는 등산객을 위해 마련한 나무의자에 기대어 주변의 경관에 눈을 돌려 봅니다. 가을빛이 곱게 물들어 있는 단풍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선경을 보는 듯 했습니다. 기암절벽 사이사이에는 들국화의 노란빛과 함께 국화 향기가 코 끝을 간질었고, 암자 처마 끝에 달린 풍경소리와 향내음이 불자(佛子)가 아님에도 불심(佛心)이 우러나오는 듯 마음이 경건해 지고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계절의 순환은 예나 지금이나 신의 섭리대로 변화없이 움직여 나가면서 우리 인간에게 많은 것을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을은 봄날의 소생과 여름의 성숙은 없지만 가을의 쇠락에도 아름다움은 넘치고 있습니다. 쇠락을 앞둔 가을은 성숙한 삶이 갖추어야 할 완결의 미덕을 일깨우고, 풍요가 잊지 말아야 할 겸손을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외경과 금도를 전하는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자연만물은 오직 우주의 질서대로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순리대로, 자연의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 해 봅니다.

 

이 가을, 낮은 곳으로 임하는 낙엽처럼 우리 정치권도 가을에서 정치를 배웠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이 정부에서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에 항상 제기되는 위장전입,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백성은 가난보다 불공평에 분노한다.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박탈감에 치를 떤다는 뜻입니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양극화와 서민생활의 팍팍한 어려움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면 미래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꿈이라도 있어야 서민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일수록 가진 자의 양보와 진정성을 갖고 먼저 손 내밀어야 할 때라는 생각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운전하는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 것은 억새였습니다. 엷은 바람에도 제 몸 하나 꼿꼿이 가누지 못하고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내 자신을 보는 듯 하여 못내 안쓰러운 눈길이 자주 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가 가을이라 했건만, 나는 뒤로 밀려나는 억새를 바라보며 “나, 바람 속에서/ 내 몸짓으로 당당히 뒤흔들리다/ 저 펄럭이는 갈대의 머리채처럼 온통/ 은빛으로 소멸해가리라”는 다짐을 되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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